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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우 Jul 14. 2018

50센트의 분노와 5달러의 선의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팀 블레이크 넬슨 감독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불행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셨는지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은 나를 비껴가기에 이슈가 되지 않는 한 그다지 큰 감흥 없이 지나곤 했던 것 같습니다.      


 별문제 없이 이 세계에서 작은 한 조각 내 세상은 잘 돌아갔던 것 같습니다. 문득 이 영화를 접하며 만난 감정은 2013년 여름, 그 날로 데려갔습니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SNS를 통한 <1인 시국선언>이었습니다. 무척 결연한 마음의 전문을 소개하면서 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 불행은 개인만의 것이 아님을 기억해 보려 합니다.                                         

 지난 금요일 처음 접한 소식은 ‘훈련 도중 높은 파도 휩쓸려 5명 실종’이란 뉴스의 헤드라인이었다. 기사 전문을 읽으며 시작된 나의 촉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예민하게 발동되고 있나 보다. 

‘태안 해병대 캠프’라는 익숙한 이름과 현재 사고가 난 학교와 연결된 십 대들이 내 주변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속속 알려지는 이야기는 우리 교육의 부실함을 여지없이 드러내 주었다. 금요일 밤을 하얗게 지나고 나는 1인 시국선언을 트위터에 했다.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었지만 어떻게든 내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밤이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로 교육을 향한 1인 시국선언을 한다. 

 한 권의 책으로 엮어도 분량이 넘칠 이 나라의 잃어버린 ‘민주주의 공화국’ 정체성을 되찾는데 결연함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여러 분야의 시국선언은 현재까지도 넘치고 있는 사안들이다. 나는 어제 태안에서 해병대 캠프로 공주사대부고 학생들에게 일어난 인재를 보며 교육의 위험 수위를 더욱 절감했다. 시급한 교육의 변화만이 민주주의의 가치 실현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여 이에 참 교육을 위한 이 나라의 위급함을 직시하며 시국선언을 한다.

하나, 잘못된 교육제도의 희생에 교육부는 과거의 식민 교육을 멈추기 바란다.
둘, 교육의 주체는 ‘학생’ 임을 자각하기 바란다.
셋. 학생인권조례를 학교 의무화로 하여 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길 바란다.
넷, 학생의 자율권을 보장하길 바란다.
다섯. 향후 교육제도의 혁신을 위한 즐거운 혁명은 기성세대들이 책임지길 바란다.

 미래를 향한 시선에 십 대들의 삶은 실종되어 있다. 언제까지 외면하고 기다리라고 할 것인가. 사회 현안들에 시급함으로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서는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들을 놓치고 있다. 

 십 대들의 신음과 무기력한 모습들에 시선을 맞추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기성세대들의 과거, 성공 신화의 허상에 압박을 느껴 스스로 삶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회의 욕망이 아니라 개인의 욕망을 향한 삶을 향유할 수 있어야만 한다. 즐거운 학교로 총총 교문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 십 대들의 생기 있는 얼굴들이 이 나라의 희망이기에 교육의 혁신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2013. 7. 19.

 

 물론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지금까지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304명 목숨이 심해로 가라앉았습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가능한가요? 내 눈 앞에 있는 커다란 배가 스르르 가라앉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요. 더 이상 누군가의 불행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지내왔던 지금까지 시간이 월터 교수의 하루와 겹쳐지면서 다시 또 그 시간을 꺼내게 했습니다.     


 영화 시작은 월터 교수 일상의 평범함에서 출발합니다. 이 순간 일상성이 가져온 결과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어이없는 불행으로 이어집니다. 월터 교수는 금요일이면 아내에게 꽃을 선물하던 사랑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는 뉴욕 콜롬비아 대학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그가 하는 마지막 강의가 있던 날이기도 합니다. 월터 교수는 남은 삶을 어떻게 보내게 되었을까요. 불행은 예고 없이 어이없게 닥칩니다.    

 

 월터 교수 강의를 듣는 대학원생인 소피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만 어울릴 수 없고, 삶에 대한 회의와 무자비하게 변하는 사람들로 고통 받습니다. 철학이 사람들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며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자해를 합니다. 마지막 강의를 하고 오던 그 날 월터 교수는 소피에게서 자해 도구를 전해 받습니다. 소피에게는 작은 희망을 품게 될 시작을 만나게 된 날이기도 했습니다.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스크린에서는 각각 등장인물의 일상이 펼쳐집니다.


 영화 첫 장면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한평생 마약 중독자로 살아온 남자 조셉은 그 날 정신병원에서 퇴원합니다. 병원 침대에서 그가 들었던 친구의 마지막 대화 끝은 "사랑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의 마약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시킨 친구였지요. 그 후 그의 행동에 약간의 변화도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만 그의 마지막 행동을 보면 친구의 '사랑한다'는 그 말. 그 힘이 한 생명을 구하는 일을 가능하게 했던 것을 알게 됩니다.    


 그가 월터 교수와 마주친 편의점에서 5달러의 선의는 의미심장합니다. 그 선의로 월터 교수는 생명을 구하게 되고 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집니다. 바로 그 순간 50센트의 도움을 친절하게, 한 잔의 커피로 대신하려던 선의가 오히려 불행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 사건 현장에는 결혼 생활의 무미건조함에서 아내를 두고 내연녀와 함께 마지막 밤을 보내던 샘이 등장하고요. 샘은 이 사건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마지막 강의를 하고 아내에게 전할 꽃다발을 사 집으로 가던 그 날, 우연히 세 사람이 만난 겁니다. 50센트로도 인간의 생명에 위협이 되는 불행이 가능하다는 게 어이없는 겁니다.


 영화 <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의 원제는 ‘Anesthesia’로 마취, 마취 상태, 무감각증을 뜻합니다. 이 세계는 무감각할수록 안전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살도록 세계는 별 볼 일 없는 지도 모릅니다.      


 영화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 지는 개인마다 다르겠지요. 영화 원제만큼 이중의 의미가 나의 선택을 머뭇거리게 할 테지요. 선의와 악의가 교차하는 가운데 소피의 자해가 충분히 마음으로 느껴지거든요. 자해가 반복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자살로 이어질 수도 있겠죠. 삶의 이중성을 오롯이 받아들여야 살아질 수 있다는 아이러니.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에도 대학원생 소피의 물음에 관한 답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똑. 똑. 똑. 기계음과 함께 앤딩 크레디트가 오르는 내내 검은 화면과 글자들 앞에서 지나온 시간과 현재, 또 내일을 생각하게 합니다. 감독은 내게 답을 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인류가 찾아가고 있는 그 진리를 향한 끝나지 않을 이야기겠지요.      

 

 “20세기는 나의 세대이자 여러분이 태어난 때이기도 하죠. 많은 이들에겐 희망, 자유, 가능성의 시대, 또 누군가에게는 자포자기와 절망의 시대이겠죠. 가장 인간적인 세기, 니체가 옳았다는 것을 제대로 실감하게 됐죠. 우리는 결국 멋지게 그러나 가슴 아프게 혼자입니다. 이런 공허감 속에서 철학은 최악의 경우 구시대 관심사로 전락합니다. 

 옳고 그름, 선과 악에 대한 논의를 제시해온 의미론적이고 자기반성적인 상대주의가 되고 맙니다. 철학은 의미를 잃어버린 자아를 탐색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장 자극이 될 만한 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질문들일까요? 요컨대 이런 거죠. 우리는 왜 사는가?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것인가? 그들은 지금 어떤가 묻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답을 찾고 있습니다. 다음 세기 여러분의 시대가 오면 우리는 뭘로 버틸까요?”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 한 부분을 이 영화로 만날 그대와 나누고 싶습니다. 이제 끝일까요? 그 답을 찾아가는 지금, 여기 우리 모두는 홀로이면서 함께일 수 있습니다. 50센트가 부른 악의에 찬 분노가 결코 인류의 끝은 아니라는 믿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존경의 대상에 기대지 않고 이제 스스로 찾고 싶어.
    

 월터 교수가 은퇴할 결심을 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내 작은 선의가 누군가에게는 희망일 수 있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무감각한 계절로 스르르 지나는 시간이 더는 아니었으면 합니다. 바람이 기분 좋은 주말 익숙함이 주는 평온에 몸을 맡기며 살아나는 감각들에 손짓을 합니다. 


 선의와 분노가 공존하는 이 세계에서 월터 교수의 선의는 내 손 끝을 떠나 사라지는 풍선 마냥 안타깝기만 합니다. 하지만 선의를 담아 다시 풍선을 띄우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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