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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우 Jul 21. 2018

사실과 진실 그 사이에서 21세기 유토피아를 꿈꾸다

[영화] The Hunt / 마스 빈터베르그 감독

 ‘정의’가, ‘진실’이 있냐고요? 옛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며 ‘권선징악’을 훈육의 기조로 삼아왔던 한국의 정서는 바짝 말라버린 우물입니다. 이곳에는 정의도, 진실도, 착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살 수 없습니다.      


 이미 물이, 생명수가 고갈되었으니까요. 오직 시스템만이 있어서 사람의 온기는 여지없이 뭉개버립니다. 언제 내가 마녀가 되어 사냥감이 될지도 모릅니다. 사회에서 약자로 살아간다면 언제든 사냥터에서 쫓기는 사냥감에 불과한 것이지요.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주인공 루카스가 아이에게 성추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감독은 미리 알려줍니다. 즉 진실을 알고 영화를 보는 관객이 루카스의 편이 되는 겁니다. 마치 내가 그의 처지가 되어 그 공간에서 그렇게 내몰리는 상황에서 만나는 느이 들게 하는 것이지요.    

  

  진실의 힘은 그렇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주변인들은 갑작스레 유치원생을 돌보던 헌신적인 남자를 성추행범으로 인정해 버립니다.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한 사회에 형성된 관습적 사고로 자리 잡은 편견을 자기중심에서 형성된 사실 판단으로 행동에 옮기는 것이지요.       



 유치원생 클라라는 친절하고 따뜻한 아빠 친구인 루카스 아저씨를 좋아합니다. 그 마음을 외면했다고 생각하는 클라라는 홧김에 거짓말을 했고,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요. 이런 상황에서 아이 클라라를 믿고 어른 루카스가 말하는 이야기는 믿어주지 않습니다. 함께 한 직장 동료 유치원 교사들이 보여주는 행동까지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라 생각하며 그러려니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루카스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자신과 가장 절친했던 친구가 오직 자기 딸이라는 이유로 있을 수 없는 행동을 보여 줍니다. 오랜 세월 루카스를 알고 관계를 지속해온 특별함은 너무 쉽게 무너져 내립니다. 주변에 가깝게 놀며 교류했던 친구들도 하나씩 배신을 합니다.


 오랜 우정도 자기 가족이 위험에 처했을 때 얼마나 이기적으로 변할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아이와 어른이라는 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위치로 진실과 상관없이 피해자는 가해자로 너무 당연하게 명명됩니다. 영화는 한국사회의 부러운 시선이 향하고 있는 선진국, 덴마크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영화 시작 부분에서 루카스는 사슴을 사냥합니다. 영화가 마무리되면서 그 사냥터에서 그는 사냥하는 자가 아니라 사냥당하는 자로 변합니다. 지금 나는 사냥터를 바라보고 있지만 내가 그곳에서 사냥감이 될 수 있다는 것. 강자와 약자가 선명하게 구분되는 곳에서 선과 악은 오히려 모호해집니다.


 사냥터는 과정보다는 결과로 지표를 삼는 경제성장과 선진국을 향해 달려가는 이 세계의 현실, 무모한 질주를 보여줍니다. 그가 처한 상황은 한국 사회와 별다르지 않게 움직이는 덴마크 사회 이면이기도 하죠. 악의로 만들어진 거짓말이 아니라면 우리는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내 판단이 과연 옳은 것인지 숙고가 요구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성범죄에서 진실이 왜곡되는 경우는 개인이나 한 집단만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바로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 바로 우리 모두의 현실입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가식으로 포장되는 경우도 다반사이니까요. #MeToo 성범죄를 폭로하는 일이 한국사회에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이제라도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 관심이 지속되고 사회변화를 가져오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가야 할까요.     


 그나마 이제라도 인류가 지나온 길에 널브러진 야만과 탐욕. 그 밑에서 신음하는 약한 자들이 갈구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도 된 것이겠죠. 폭로에 백래시는 넘어야 할 당연한 과제로 부각되고는 합니다.  백래시로 표출되는 행위는 어느 정도 강제하며 학습된 사회 관습에서 이어지고 있으며 그 잘못된 문화는 뿌리가 깊습니다.


 그 뿌리 깊은 문화가 자연스러웠다고 해도 잘못된 문화라면 바꿔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성범죄 공소시효라는 장벽과 가해자가 오히려 당당해지도록 만든 사회제도의 미흡함도 보완해야 하겠지요.  그렇기에 공동체 구성원이 할 수 있는 일. 사회구조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풀어가고자 하는 관심과 행동은 무척 중요합니다     


 현재까지도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경찰을 통하여 제대로 된 사건 해결을 받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범죄들을 대중에게 폭로하고 이슈를 만들어 해결하려는 #MeToo에 응원을 보내는 #WithYou가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진실을 밝히는 일은 성범죄가 발생하기 전에 막을 수 있는 이 사회 구성원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거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에서 교훈을 얻습니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학명으로 불리기도 하는 사람은 지혜를 발휘할 수 있다는 슬기로움이라는 특성을 대표한 거겠죠.

  

 현재 결과로 드러난 사실만으로 눈에 보이는 정황만으로 진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우리는 압니다. 그렇기에 성범죄 과정에 집중해야 하는 거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모든 일에는 결과에 따른 그 책임이 있기에 개인 동의 없이 일어난 일에 면죄부를 주고 있는 사회는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이 그 모든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폭로 과정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인권을 침해받는 사회. 사회 구성원 절반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멈출 수 있도록 모두의 노력이 절실합니다.


 매일같이 발생하여 누적되는 성범죄로 생기는 불행과 절망으로 공동체는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별 의문 없이 답습된 사회 관습이 절반에게 불행을 준다면 당연하게 치워버릴 일입니다.      

 


 한국 사회가 바라보는 성범죄에서 피해를 본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피해자 잘못을 일정 부분 전제하기에 가해자 중심 수사나 처벌은 진행되지 않고 있으니까요.


 이 영화에서 루카스가 남자가 아닌 여자 선생님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소년과 여자 선생님이었다면요? 분명 피해자든 가해자든 성별 문제로 그 입장이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범죄라는 사실과 진실이 서로 엉키면서 중요한 논의가 실종되고는 하니까요.     


 사람이 사람을 해치는 일은 나이와 성별과 상관없이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을 정도의 의식은 누구나 갖추어야 하는 겁니다. 그게 사람 된 도리이며 당연한 존재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사람의 도리를 저버리는 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요. 그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우리는 해야 합니다.      


 삶의 의미와 존재의 이유를 태어나면서부터 배워갈 공동체. 사랑이 서로를 어루만져 줄 그런 공동체를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성평등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을 일상에서 실현할 수 있는 작은 노력을 하고 있는 이유.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 있는 사람이 모여 만들어가는 공동체.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유토피아가 아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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