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자본주의 : 사랑이야기 / 마이클 무어 감독
실제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본주의'가 도대체 무엇인지 꿰뚫을 수 없었습니다. 개인의 무지로만 탓하기에는 쉽게 수긍하기가 힘들군요. 그 이면을 찾아 거슬러 가면 우리의 역사에서 장렬하게 숨진 '정의'라는 가치를 잊도록 해온 사회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본주의를 맹신하게 하고 사람보다 돈이 우선시되는 것을 방관하게 한, 기성세대의 이기적인 탐욕이죠. 현재 대한민국에서 만나는 참담한 현실, 구할 수 있는 생명을 돈과 맞바꾼 것과 다르지 않은 현실과의 맞대면을 불러온 것입니다.
2009년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는 미국의 2008년 금융위기가 갑작스럽게 맞이한 것이 아니라 예정된 것이었음을 설명해 줍니다. 미국은 자유의 나라, 자본주의라는 인식이 그들의 역사 속에서 신성시되어 왔으나 자본주의 이면에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사회였죠. 자유를 최우선의 가치로 놓으며 시장의 자유와 정경유착의 고리들이 사회적 약자의 삶을 어떻게 파괴시켜 왔는지를 보여줍니다.
맹목에 빠진 자본주의와의 사랑 이야기는 미국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난 현실 상황, 노조탄압과 비정규직의 양산, 청년 실업과 증가하는 자살률들이 그것이죠. 경제성장의 하락과 불황에 겁먹을 것이 아니라 질적인 성장과 불황의 극복에 힘을 모아야 합니다. 경제의 성장이 사회 공공의 영역에 고루 분배될 수 있는 경제 민주화 요구가 절실하기에 새로운 정부의 탄생에 표를 모은 것이죠. 그 기대감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의 빈말들은 이미 공중분해되었고요.
현재 정부는 어떨까요. 이제 시작한 정부의 공약 이행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기를 바라지만, 삐거덕거리는 노동 관련 공약은 최저임금 상승으로 한 걸음 나아간 모양새이지만, 내용은 후퇴했습니다. 노동자가 죽어 가면 자본가도 없다는 말이 현실화될 때를 상상할 수 있다면 그 답은 이미 주어졌는데 말이죠. 노동자와 자본가가 상생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기 위해 정부의 개혁 노력에 힘을 집중했으면 합니다.
제레미 리프킨은 저서 <노동의 종말>에서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인류는 노동으로부터의 소외와 추방이라는 암울한 미래를 맞이하게 된다고 비관적인 전망을 했습니다. 이런 비관적인 미래는 노동자를 자본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노동자를 돌아보지 않는 사회의 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암울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종말’이기도 하죠. 자본은 노동에 의해 축적되어 왔어요.
노동은 이 세상을 유지시키고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노동이 없다면 변화와 진보, 발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활동은 노동 외엔 없기 때문이죠. 개인에게 있어서 노동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수단이자 존재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은 시간과 노동의 압박에서 과도한 경쟁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2016년 구의역 스크린 도어 사고.
뱀파이어 효과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려면 내 피를 빨아들여 자기 생명을 연장하는 뱀파이어 역할을 누가 하고 있는지... 둘러볼 일입니다.
텅 빈, 삶에 고용 없는 성장만을 지속시키는 경제구조를 바꿀 사회적인 합의와 해결을 위한 부단한 노력은 반세기를 지나왔습니다. 인간을 중심에 둔 노동을 바라보는 시선과 인식의 전환. 인간의 특별함에 치중하여 욕망 충족만을 위해 오만하게 살아온 삶에도 성찰이 필요해요. 자본주의가 만든 경쟁만을 위한 황폐한 현실은 노동의 가치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부조화로 인한 인류 문명의 종말까지를 초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만들어낸 사회 관계망은 생태계와도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 속의 일부이며 자연이나 다른 생명체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런 현실들을 자각하고 깨달아 인간이 갖고 있는 특별함을 모든 생명체를 향한 조화를 위해 발휘해야 합니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들을 공론화해야 합니다. 노동의 기쁨으로 삶의 충족감을 느낄 수 있는 사회로 변화될 수 있을 때, 노동자는 더 이상 죽음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특정한 경제적 진실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에, 제2 권리장전 아래 모두를 위한 새로운 안전과 번영의 토대가 신분과 인종과 종교와 관계없이 마련될 것입니다. 그것은 알맞은 보수의 일자리를 가질 권리, 적절한 음식과 의복과 유흥을 누릴 권리, 모든 농민이 작물을 기르고 팔아 그와 가족이 걸맞은 생활을 영위할 권리, 모든 기업인이 사업함에서 불공정 경쟁과 국내의 독점에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모든 가정이 적절한 주거를 누릴 권리, 노령, 질병, 사고, 실업 등의 경제적 공포로부터 적절히 보호받을 권리, 좋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권리, 이 모든 권리가 말하는 건 사회보장입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 우린 이들 권리의 이행을 통하여 인류 행복의 새로운 목표에 정진해야 합니다. 자국에서 사회보장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세계 평화도 지속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1943년, 2차 세계대전 중 발의한 '제2 권리장전'입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죠. 그의 새로운 권리장전은 미국에서 제정되지 못했습니다.
왜?
영화에서 마이클 무어 감독이 했던, 씁쓸하지만 그래도 가장 희망을 담은 한마디는 자본주의에서 유일하게 공평한 것, '1인 1표'뿐이라는 점. 1%의 그들이 두려워하는 유일한 한 가지는 99%의 이것이라고 말이죠.
one Person, one Vote, 한 사람에게 한 표!
현재의 미국은 자유시장을 통한 자본주의 국가로 세계를 향한 경제 개입을 자국의 군사력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여기서 결코 비켜날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해야만 하겠죠. 우리에게 이식된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는 이미 한계점에 와 있고, 그 사례가 눈앞에서 확실하게 이미 세월호 참사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자본에 잠식된 경제 체제의 시스템에 변화를 주고 정책 결정에서 자본의 유착을 떼어 낼 나의 한 표가 필요한 현재라고 믿었습니다. 또 반복할 수는 없잖아요.
국가를 사랑하는 일이 개인들의 삶과 이어져 국민들은 국가의 성장을 위해 묵묵히 희생을 해 왔습니다. 그것들을 바탕으로 성장한 국가는 국민들의 삶을 돌아보고,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에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죠.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 회색 신사들의 말이 정부의 허망한 말들과 겹쳐집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딱 한 가지, 뭔가를 이루고 뭔가 중요한 인물이 되고, 뭔가를 손에 쥐는 거다. 더 중요한 인물이 된 사람, 더 많은 걸 가진 사람한테 다른 모든 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거라며 바쁘게 시간을 아끼는데 모든 힘을 쏟아라.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며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고, 생명의 가치를 얼어붙게 만든 겨울왕국의 부역자들, 그들은 사람들의 시간을 훔쳐갑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존재하지만 온전하게 살아있는 것은 아니죠. 국가의 부(富)는 소수의 기득권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수의 기업과 권력자들 스스로 무(無)에서 부(富)를 창출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회 구성원들은 전반적으로 경제적 성장에 주된 기여를 해왔습니다. 그렇기에 그만한 보수를 대가로 가져가야 한다는 거죠. 그것은 사회로 환원될 사회복지이며 보다 나은 삶의 질을 마련하기 위한 공공선입니다. 국민들을 극단적인 파멸로 몰아가는 자본주의는 모모에 등장하는 회색 신사들, 시간도둑을 닮았습니다.
이제 훔쳐간 것들을 자발적으로 돌려주길. 사회 제도를 정비해서 빼앗긴 자들에게 돌아가도록 겨울왕국 같은 이 저주가 부디 풀릴 수 있도록 강력하게 요구해야 합니다. 이런 말로 펼쳐지는 풍경이 얼마나 헛된 짓인지를 알면서도 또 그렇게 소리를 냅니다. 더 이상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는 짓을 내버려 두지 말자고요.
자본주의 사랑은 이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