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

『마야』 요슈타인 가아더

by 이창우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르네상스 시기부터 분화되어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한국 사회는 그 경계가 뚜렷해서 문과와 이과로 분리해 교육이 진행되었고 그 자연스러움은 한 인간에게 더할 수 없는 편협한 사고에 머물 수 있게 한다.


환원주의는 논리가 설 자리를 가져간다. 인류의 역사와 발자취를 들여다보면 논리가 없는 전개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다. 소설의 형식으로 인류의 현재를 설명하는 작가의 방법론은 진화를 슬그머니 포함하고 있다.


안나와 호세라는 등장인물과 진화생물학자 프랑코의 말을 빌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든다. 인류의 조상이 도마뱀이라는 양서류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지구에서 삶은 전체 생명체를 통틀어 볼 때 아주 짧은 시기에 흔적을 남긴다. 평균 수명이라는 통계로 접근할 때 100세 시대라는 것이 전 인류에게 해당될 수 없는 것처럼.


개인은 각기 주어진 삶을 살아내고 그 후에 일어날 내일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단지 죽음과 탄생이 반복되면서 내 유전자의 변형된 무엇인가는 또 다른 개체로 이어진다.


양서류가 처음으로 지구 상에 출현한 데본기까지 거슬러가는 수고는 살면서 해본 적이 없다. 기원전 후의 역사만으로도 벅찬 지식이고 그것을 이용해 살아오지도 못한 아주 작은 개인의 경험에 기댄 채 생각할 수 있으니까.


이윤에 빠져 물질을 욕망하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진화생물학이라는 이 거대한 흐름은 내가 머문 삶이 한순간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머물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 마음의 평안이 가능한 것은 지금 이 순간만이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인데 무의식적으로 축적된 내면세계에서 시작된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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