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책방 21.

우정과 사랑

by 이창우

봄빛이 가까워 오자 엄마는 나이 타령을 한다. 올 해로 나는 다시 스물일곱이다. 한 가지 방식으로 나이를 가늠하겠다는 제도 변화로 제자리걸음이 가능하다니. 재미있기도 하지만 나이라는 숫자매김에 관심 없는 내게는 그러거나 말거나.


재인아, 우정을 오랜 세월 나누다가 연애로 이어지고 결혼하면 이상적이지 않니?

연애하는 것과 결혼하는 것은 다르잖아요.

뭐가 달라? 엄마는 결혼 생활 내내 그런 생각을 자주 했거든.

우정은 서서히 진행되지만 사랑은 순간이라 생각하는데.

그래, 그 우정을 사랑으로 이어가고 그러면서 서로 충분히 알고.

그런 이론이 현실에서 정말 가능해요?

요즈음 젊은 애들은 조건이 붙는 결혼을 하려니까 그렇지. 아니야?

엄마, 결혼은 현실이라잖아.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있어요?

재인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 설마?

사랑은 일방통행으로 이룰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죠.

재인아, 이사하는 거 도와주던 그 정윤이라는 친구 괜찮더라. 성격도 마음도 살갑고.

엄마? 엮으려고 하지 마세요. 친구예요, 친구.

여자남자 사이에 친구는 연애로 가기 전에 거치는 통과의례 같은 거야.

제발요. 그런 것은 기대도 하지 마세요.

직장만 제대로 잡으면 사윗감으로 딱인데.


언니에게도 우정과 사랑이야기를 어지간히 하셨다. 요즈음 더 많이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서 엄마는 현실 감각을 애써 외면하기로 작정한 것 같다. 일찍 아빠를 떠나보내면서 장례식장에서 우두커니 초점 잃은 엄마 눈은 건조했다. 그때는 마음을 표현하는 일도 성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경우는 거의 기억에 없다.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기는 했을까? 엄마에게 사랑은 어떻게 포장되어 있는 것일까.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내 기억 뭉치는 운전대에 머리를 처박은 채 피를 흘리며 일그러져 있는 얼굴이다. 그 얼굴이 불쑥불쑥 선명하게 튀어나오던 몇 해 동안 모든 것이 황량했다. 공황장애인지도 모른 채 사람을 피하며 선희에게 껌딱지처럼 붙어 있어야 가능한 생활이었다. 선희만이 그 기억을 떠올리지 않게 하는 연결 고리가 없던 유일한 사람이다.


사랑을 이룰 수 없다는 이유로 목숨을 내던질 수 있을까. 답을 알 수 없는 과거 사건에 관한 궁금증이다. 문학에서나 가능한 설정 아니었나. 그런 사랑을 하고 싶은 인간이 가진 허기진 욕망이라 생각한다. 한순간 타오르는 열정을 반영하는 호모 에로스들이 벌이는 놀이거나 그렇게라도 품을 마음으로 현실을 버티어낸다거나.


가족도 친구들도 나를 이상주의자라고들 한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일부분인데도 편리하게 쉽게도 규정짓는다. 나는 개인주의자이고 현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상 따위는 생각하며 살아오지 않았다. 내가 아는 이 세계는 말로만 떠드는 이상이 있을 뿐이니까. 오롯이 '나'로 살아가는 것이 우선이다. 가족이든 친구이든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이 닿는다면 그 어떤 연결됨 따위는 문제 되지 않았다. 늘 마음이 문젯거리다.




[발행] 브런치북 : 수상한 책방 01화~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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