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 / 알랭 바디우 ,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철학자 라캉은 투쟁적 사회참여는 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시사 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프랑스의 문화적 삶에 나타난 본질적 움직임들을 포착하는데 소홀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정신분석의 실천에만 투신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재활용되는 것을 고집스럽게 거부했다. 폭력적인 혁명이나 극단적인 행동보다는 상징적인 울타리 역할을 했다고 루디네스코는 말한다.
바디우에 의하면 라캉의 타고난 재능 중 하나는 그 사유의 구성적 모호함에 있다. 부인할 수 없는 보수적 단면들과 극단적 급진성의 요소들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법’과 아버지의 상징적 규정만을 고려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의 구조들에 사로잡혀 있긴 해도 자신의 욕망에서 물러서지 않는 지점에 도달한 주체의 경험에 방점을 찍는다면 ‘해방’이다.
라캉의 ‘끝나지 않은 혁명’은 극단적인 행동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라는 라캉으로부터 철학을 통해서 정치적 전복을 꾀하는 선동가들의 탐욕일 뿐이다. 라캉은 인종주의와 그 변형인 공동체주의, 광적 개인주의, 그리고 특히 선동에 좌우되는 대중의 어리석음, 여론의 지배가 서구 세계의 공포와 종말, 허무주의로 기울 수 있다고 보았다.
민주주의에 동반하는 여론의 본질적 역할에 제어 장치가 부재할 경우 대중의 우민화는 전체주의적 위험을 내포한다고 보았던 토크빌적 측면을 거론했다. 무한한 진보와 모두를 위한 행복이라는 이념을 믿지 않았다. 현대의 자본주의와 야만적 세계화, 한계를 모르는 금융화, 보편화한 신보수주의 세계라고 바디우는 이 대담에서 말하고 있다.
나는 라캉이 끊임없이 여러 철학자를 소환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분야의 논리에 따라 걸러지고 재해석되어 정리할 수 있는 그의 정신이 ‘혁명’이라 생각된다. 라캉은 선호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텍스트 원문에 충실하게 근접해 있고 해석이 대담하며 통합과 배제 사이에서 철저하게 갈등하며 자유롭게 나아갔다.
철학을 자기 학문의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는 정신을 배우는 수고와 이성과 과학의 시대를 맞아 위기를 느끼는 개인들의 사유, 그것이 ‘끝나지 않은 혁명’은 아닐까.
“우리는 종교적 광기도 과학주의도, 미쳐 날뛰는 돈도, 과도한 평가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이성의 이상들이 내버려졌다는 징후이다. 요컨대 우리는 정치적 참여가 노동과 엄밀함, 깊이 있는 지식과 같이 가야 한다는 확신을 공유한다.”
알랭 바디우와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의 대담 형식의 이 책 서문이다.
여기에서 발견되는 문제의식이 한국사회에서는 먼 미래에나 가능할 듯 요원하다. 2011년 라캉 서거 30주기를 기념하며 나눈 ‘라캉 30년 후’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본에 의해 인간이 수장당하는 현실이란 세계가 2041년 세계에서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있기를 바라본다.
라캉에게 ‘주체’는 분할되어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해 알면서도 무지하며, 쪼개어져 있고, 어떤 근본적 타자성에 노출되어 있다고 바디우는 말한다. 즉, 자본주의 속의 주체들이란 쏟아져 나오는 신기한 상품들과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실질적인 사회적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일자들이라는 점이다. 소비주의 시대에서 더는 소비자가 주체일 수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라캉은 철학을 자양분으로 삼았다. 프로이트를 마르크스에 견주고, 자신은 레닌에게 견주었다. 그렇기에 라캉의 혁명은 국가적 억압 때문에 봉쇄된 집단의 개방성을 다시 가동시키는 것이다. 프랑스 68혁명과 1980년대 사이에 젊은이들이 보여준 것처럼 사회에 대한 불순응시나 과도한 독창성 때문에 받을 심리적 고통은 정치와 상관없는 치장을 하지만 요인 중 하나였음을 사유한다.
혁명가로서 여러분이 갈망하는 것은 바로 주인이다.
라캉은 이 책에서 무엇을 저항하는지를 정확히 정의할 수 있다면 진보적인 행위였다 말한다. 철학하기는 '묻고 답하기'이다. 거창한 이론과 철학서에 집중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매일을 수많은 질문과 답을 하고 있는 자신과의 이야기 나누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