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가능성, 다른 세상을 모색하는 것

시간을 거슬러 05.

by 이창우


부디 자기 삶을 살아가세요.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자신을 반복적인 자동성에 맡김으로써 스스로를 방치하지 말고, 진리를 확신하는 주체의 삶, 신념을 지닌 삶을 살아나가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단히 피곤한 삶이라는 것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요. 그래도 피곤하고 머리 아프지만 그 피곤함을 감내하고, 끊임없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것은 실제 아주 간단하죠. 나만 잘 챙기면 되는 일이 왜 그리 힘든 것일까요. 그것만이 인간이 인간으로 남는 길이며 그 길을 포기하면, 그저 우리는 '먹고사는'데만 신경 쓰는 인간-동물에 머물 뿐이라는, 당장은 참으로 쓴 이야기를 이 책에서 건넵니다.


현대를 '이념'이 사라진 시대라고들 합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극단적인 역사에 장을 넘기며 인류는 21세기로 접어들면서는 '지구촌'이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지요. 허나 이 지구촌이라는 말은 교과서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말로 사용될 뿐이었죠.


대한민국은 여전히 동과 서, 남과 북이라는 긴장감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남쪽에서는 '세계화'에 북쪽에서는 '주체화'에 갇혀 서로 평행선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정당성을 잃은 현 정부가 보여주는 최근 정책 방향들이 그 좋은 예는 아닐는지요.

민족의 공간에 두 원칙이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며, 과연 미래를 낙관할 수 있을지요. 아니기도 하고 그렇기도 합니다. 극단적인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기는 쉽지만 상생을 위한 길을 모색해 내기가, 새로운 이념(사상)을 만들어 내기가 벅찰 뿐인 거지요.


우리는 지난한 역사라는 수레바퀴에서 삐져나오며 달콤한 자본주의에 심하게 매료되어 왔습니다. 자본주의가 도대체 어떤 체제인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세계화'의 철학인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와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왜, 해당되지도 않는 대상들이 정부의 ‘종부세’에 반대하는가. 세금을 내는 주체가 종부세 대상이 누구인지 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다는 게 경제와 관련된 우리 현실인식입니다. 투명한 월급쟁이들과 힘없는 자영업자들, 고용불안에 떨고 있는 비정규직에겐 부과되지 못하는 세금인데 말입니다.


1%의 부를 가진 자들이 마땅히 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우린 늘 잘 모르기에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죽어라 고생을 하는 것이지요.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이런 경제구조를 안다면 적어도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권리를 적극 행사하거나 이런 경제구조를 과감하게 거부할 수 있으면 됩니다.


어느 대안 방송 진행자가 ‘을’들의 고용계약서와 관련해 머리가 없고 가슴만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너님, 후대에겐 병신인 거예요!' 격하게 하는 말을 들었어요. 그와 반대로 머리만 있는 이들이 만든 사회구조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면 세상은 조금 덜 불평등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가슴만으로는 살 수 없는 현실을 알아차리면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었을까. 개인적으로는 회의적이었습니다. 가슴은 쓰레기통에 처박고 머리만 있는 인간들이 '자유'와 '평등'을 내걸며 저들에게로 치우친 사회제도를 만들어 왔고 우린 그것들을 묵인해 왔으니까요. 불평등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할 문제의식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지요.


바디우는 부자들에게는 조세 감면, 환경 보호 정책 후퇴, 교육과 복지 정책 포기를, 세계적 차원에서는 '부익부 빈익빈'만을 낳은, 인간적 모습마저 잃은 자본주의를 통렬히 비판합니다. 새로운 실천을 요구할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게 바디우의 '투사(鬪士)'는 자본주의의 어두움이 지속되는 가운데 '정치의 조건들'을 사유하는 주체의 개인을 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민주주의, 정치, 철학이라는 세 항 사이에는 무언가 역설적인 관계가 있는데 바디우는 민주주의에서 철학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말하지요. 우리만의 철학이 다른 가능성, 다른 세상을 가능하게 하지는 않을까요.


철학은 누구에게나 '주장'에 대해서 찬성과 반대를 미리 선택해 놓지 않지만 그 주장을 인정하거나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유를 통해 누구나를 위한 것이 되도록 결론지을 수 있게 되죠. 허나 그 결론조차도 말하거나 사유하는 사람의 사회적, 문화적 또는 정치적 지위에 완전히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철학은 민주주의의가 작동되는 다수에 의한 결정 방식이라 할 수가 없는 거지요. 철학이 추구하는 진리는 다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철학은 머리와 가슴이 함께 움직일 수 있기 위하여 필요한 사유입니다. 이제 본질적인 구조 변화를 위한 투쟁은 연대라는 행동만으로는 역부족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가 진행되는 시간에서 바라보자면 '혁명'또한 현재를 변화하게 하려는데 급급한 조급증의 결과라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해 자본주의가 더 이상 그 힘을 발휘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은 '나'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현실의 움직임을 알아가고, 비주체로서 허위욕망과 그로 인해 발생되는 내 안의 탐욕을 부추기는 이기주의를 털어낼 가치 지향이 필요합니다. 온전하게 삶을 향유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하겠지요. 분명, 바로 일어날 수 있는 변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굳이 후세대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걸자면 세대를 몇 번은 지나야 한다 해도 이제는 본질에 시선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내가 '투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이 시대의 '혁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종(種)의 공멸을 막기 위한 한걸음에 의미가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바디우가 말하듯 자기 자신을 반복적인 자동성에 맡김으로써 스스로를 방치하지 말고, 진리를 확신하는 주체의 삶, 이념을 지닌 삶을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 인류를 위한 '새로운 이념', '새로운 철학'이 나와 너에게서부터 마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바디우를 참고로 하여 우리의 정서에 맞는 김상봉교수의 ‘서로 주체성의 이념’을 주목합니다. 우리에게도 우리 철학이 가능하다는 그의 연구는 같이 고통받고 같이 형성하는 사람들이 우리라는 시선을 갖는 것입니다.


비인간적인 것으로 얻어지는 풍요로운 요소 안에서 인간의 상징성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 이상주의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이상을 향해 기꺼이 투사가 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의 노예성에서 벗어나 보다 인간적인 형상을 지켜내기 위한 철학이 내 안에서 꿈틀거려야 합니다.


민주주의가 삶과 공존하게 될 때, 민주주의는 그 가치를 실현하게 될 것이고, 정치는 비로소 권력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장(場)이 될 것입니다. 니체가 '최후의 인간'이라 불렀던 비극의 모습, 모든 형상을 잃은 창백한 형상으로 남은 인간이기를 결코 허용할 마음이 내게는 없습니다. 이 책을 읽고 오랜 시간 나는 투사와 사랑에 빠져버린 거지요.


2014. 6. 24. 알랭 바디우 『투사를 위한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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