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탐구] 씩씩한 남자 만들기 / 박노자
박노자는 한국사회의 남성들이 말하지 못하는 '경제화'된 한국의 남성성의 계보를 찾아간다. 학력과 경제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면 철저하게 소외당하는 주인공들이 걸어온 길이다. 조선 인종, 동양 최고의 남자들로 19세기 말 조선의 근대주의자들은 조선인의 타고난 인종적 체형이 우수하다고 강조하며 이를 자랑으로 삼았다.
“조선인의 체격은 동양 인종 치고 가장 우수하다!”는 인종론적 낙관주의는 식민지 상황이 가져온 조선인의 열등감을 타개하고 조선도 문명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2초라는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고 우승한 손기정은 이 같은 조선인의 인종적 우수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간주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박노자에 의하면 박은식의 “영웅 이순신”은 유교적인 “선비”이기도 하지만 분명 “대장부 선비”였다. 필력이 좋은 개화파 유림들은 유교를 “현실적, 실용적 철학”으로 갱신하고 이순신 등 전통 시대 영웅과 달리 근대적 영웅은 “윤리”가 아닌 “국익 기여”와 같은 공리주의적 잣대로 재단되었다고 말한다.
전통시대 사학자들이 “반역자”로 생각했던 연개소문 등도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영웅”으로 둔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 시대의 영웅 만들기는 집권자들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씩씩한 남자 만들기 만큼이나 현모양처를 내건 여자 만들기는 꽤 오랜 기간 한국인의 정서, 그 바탕에 드리워져 있다.
사회적 힘의 논리로 남성주의와 여성주의로 학습되어온 사람들은 서로를 할퀴며 상처를 주고받는 역할을 해 왔다. 사회에서 강제하는 희생을 공공의 선으로 포장하여 마치 미덕처럼 여기도록 만들어 왔다.
영화 <명량>의 주인공인 영웅 이순신은 근대인들에게도 흠모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현대에 와서도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박정희의 거대한 이순신 동상 세우기로 그 의도는 드러난다. 세종로에서 그 길의 주인공인 세종대왕을 뒷방으로 치우고 힘이 있는 장군만이 나라를 지킨다는 의식화를 통해 쿠데타를 정당화시키는 박정희의 전략은 크게 성공했다.
'애국심'을 포장한 '은폐'는 현재까지도 주도면밀하게 퍼지고 있다. 거대한 동상의 힘, 박정희의 혼령이 떠돌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영웅이 필요한 시대는 이미 지났다. 더욱이 만들어지는 영웅은 태어날 때부터 태몽에 의해 그 행보가 달라지기에 한국의 위인전에 등장하기 위해선 어머니의 꿈, 태몽이 중요해진다.
지난 시대에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영웅이 나라를 구할 것이라는 기대심리는 개인들의 삶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하늘의 부름에 의해 영웅으로 선택된다는 의미는 현대인들에게 과중하게 압박되곤 한다. 몸짱 만들기의 문화에 인간의 중심은 괴롭다.
개인이 모여 사회를 만들어 가면서 열릴 다양함과 관용은 외면한 채 국가를 우선하고 개인의 삶을 희생하여야 하는가?
그 충돌 지점에 잔혹한 군대 문화는 씩씩한 남자 만들기에 그 몫을 충실하게 해 온 것이다. 인간을 중심에서 벗어나게 하고 규정됨으로 인간성은 배제되었을 뿐이다.
오래전부터 군대문화로 자리 잡아 벌어진 일들이 극단적인 모습으로 속속 드러나는 현재 한국사회는 씩씩한 남자들의 과묵함 덕분에 곪았고 터지는 중이다. 그 상처를 도려낼 용기가 필요하다.
흔히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덜하지만 어릴 때 한 번쯤은 들어본 말이라기에 남자들한테 세 번이면 언제냐고 물어본다.
대체로 내 주변의 젊은이들은 두 번까지는 기억해낸다. 태어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 한 번은 잘 모르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사회에서 왜곡되어 이식된 '씩씩한 남자'의 비틀어진 내면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울 수 있도록 허용된 것은 "나라가 망했을 때"이다.
나는 세 번의 울음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남자들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슬픔을 표출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키우는 것을 어릴 적부터 주입하고 그에 의해 씩씩한 남자 만들기는 사회의 암묵적 합의에 의해 지배 블록화 되어왔다.
그런 가운데 그에 걸맞지 않은 수많은 남자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무엇으로 버티어 왔는가를 생각하면 된다. 남자로 살아가기 위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를 주저하고 외면해 왔던 집단의식은 한국사회의 병폐의 하나인 병영문화로 이어진다.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진짜 남자가 된다.
거.짓.말.
이 암묵적 합의가 있었기에 결국 목숨을 버려야 하는 일들로 연결된다. 한국의 이상적 남성성의 역사를 파헤친 박노자의 시선은 한국사회에서 ‘남자’로서 또는 ‘여자’로서 살아간다는 고정된 성 역할이 얼마나 고질적인 사회문제를 야기해 왔는가를 역사성을 통해 보여준다.
한국사회의 분단이라는 특수성에 의해 각 개인들은 남자 또는 여자라는 성의 역할로 규정되어 한 ‘인간’으로 대우받을 수 없었다. 이런 의식들은 성별, 연령별의 역할극을 마땅하게 받아들이도록 학습해 왔고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역할들을 위해 일정 부분 희생을 당연시해 왔다.
씩씩함이란 신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에 더 적절하다는 표현이라 생각하는 나로서는 잘 다듬어진 근육질의 남자가 그리 씩씩해 보이진 않는다. 잘 빠진 몸매의 가냘픈 여성만이 여성스럽지만은 않은 것처럼 신체가 전달하는 효과는 미미하다.
오히려 신체적으로 연약해 보이는 남자가 한 일련의 행동에서 만나게 되는 감정들에서 ‘씩씩하다’는 말이 나온다. 작은 일들에도 섬세하게 대응하며 온화함으로 주변인을 얼싸안아 다독이는 모습에서 여성스러움을 느낀다. 생물학적인 분류의 성은 그저 그 기능이 '다름'일 뿐이다.
씩씩함은 강한 내면의 힘에서 근원을 찾아내는 것이어야 하고 그 대상은 남자, 여자와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 할 수 없는 한국사회는 이 역시 현실적인 문제로 뒤로 해야 한다.
분단된 나라에서 살아가는 남자로서 병역의 의무를 신성시하려는 분위기를 탓할 생각은 없다. 다만 몸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근대적 방식이었다면 현재 한국사회는 이 뒤틀린 문화에서 벗어나려 하는 모험정신이 필요할 뿐이다.
현실에 안주하거나 규율화에서 탈출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한 개인이 이룰 수 없는 제도에 의한 변화는 사회적 합의에 의해 시작되어야 한다. 한국사회가 모험을 시도할 때임을 가리키는 일들에 시선을 모아야 한다.
국가의 부름에 응한 군 복무 중, 죽음으로 청년들이 말을 건넨다. 군 의문사. 누적된 희생의 증거들로 충분하지 않은가. 몸과 마음이 건강한 개인들이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던가.
다시 8월이다. 한국사회의 남자들이 겪어온 병영 문화의 야만성과 그 슬픔으로 통곡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고뇌하는 인간들의 계절로 열리길 바란다. 서로 나눌 아픔이면 덜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