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문제
이미 코스피 4천 시대. 성장이라는 단어가 대통령 신년사에 몇 번 나왔다는 이야기. 2026년은 이미 숫자로 시작되고 있다.
실용과 성장을 지향하는 국가에서 지금 내 감정을 표현하려다 보니 밋밋하다는 단어가 떠오른다. 대통령의 신년사를 들으면서 동요하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화자에 있다.
해마다 반복하는 보신각 종소리만큼이나 스치는 공기의 울림이다. 아마도 쌓인 세월의 무게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굳이 달라졌다면 공간의 변화 정도이다.
적어도 내 의지가 반영되어 살아온 스물부터 나에게 실용이라는 단어는 자주 등장하거나 주변에서 듣게 되는 상황도 기억에는 별로 없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자본주의에 관한 믿음이 없다. 마이너스에서 시작해 0으로 가고자 하는 일상에서 최근 비판하는 한 사람은 이제야 내 삶에 직접 들어온 가족 중 1인이다.
지나온 세월을 인정하고 보이는 현실에서 그야말로 실용성은 거의 없는 자산을 목격한 후 이미 살아온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남은 시간만이라도 실용을 우선했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건넨다.
직접 와서 같이 지내다 보니 알겠다는 어느 정도의 인정을 담아 건네는 그의 조심스러움에 고개를 끄덕인다. 2025년을 정리하던 연말에 감정들이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현재 나에게 실용은 내 삶에 온전하게 집중하고 몰입하는 일이다. 그 실용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겪은 순간이 다큐처럼 엮여 드러난다. 보다 선명하게 취향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덕분이다.
그 앞에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긴 세월이었기에 굳이 꺼낸 한 문장으로 대화는 잘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는 몸짓으로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새 봄을 기다리기로 한다.
길 위에서 다르게 걸어온 취향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그는 실용을 나는 예술을 삶에서 우선 선택했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내일을 나는 오늘을 우선으로 두고 살아낸다.
과연 누가 취향을 비판할 수 있는가?
K-철학의 부재는 취향의 획일성을 강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