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가 아팠고, 죽었다.
갓 서른이 된 내 친구가 아프고, 죽었다.
당신은 이런 경험이 있나요? 누군가가 묻는다면 아마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친구가 아팠다고 했다. 담낭에 암이 생겨 수술을 받았고, 절제를 잘 해냈다고. 친구가 수술을 받는동안 나는 회사와 연애, 그리고 나중에는 결혼 준비로 바빴다. 내게만은 늘 상냥했던 친구는 회사 다니는 애 신경쓸까봐, 결혼 준비중인 내가 걱정할까봐 말도 못했다고 했다. 그런 애가 내 결혼식에서 축가를 불렀다. 가장 친했고, 많은 시간을 보냈던 나의 중학교 동창 둘이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와 눈 맞추고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때도 몰랐다.
14살, 우리는 중학교 1학년때부터 같은 반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같이 중2병을 세게 앓았고 술과 담배를 시작하고 오빠들을 만났다. 쪼그마한 녀석들이 뭔 술을 얼마나 마셨겠나 하겠지만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하나같이 말술이었던지라 금복주 한통을 둘, 셋이서 노나 마시곤 했다. 담배도 친구들 따라 피워 보았으나 내게는 구역감을 세게 일으켜 일찌감치 관두었다. 셋 다 사는 내내 말술로 살았다. 친구들은 그때 시작한 담배를 여태 끊지 못했는데 지금에와서 자주 생각한다. 우리가 그때 그렇게 일찍 술담배를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셋 다 지금보다 훨씬 건강하지 않을까? 적어도 친구를 잃는 일은 없지 않을까, 그런 부질없는 생각들을 자주 했다.
내가 찍어준 친구
친구가 찍어준 나
친구가 치료를 위해 엄마와 함께 서울에 왔다고 했다. 더이상 병원에서 할 수 있는게 없어 암 말기 환자들을 면역을 끌어올려 치료할 수 있다던 서울 강남의 어느 한의원에서 치료 받기 위해 원룸을 잡고 친구 엄마와 둘이 올라와 있다고 했다. 친구 아버지에게 소식을 듣고 그 날로 친구를 졸라 겨우 얼굴을 보러 갔다. 이런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해서 더 속상하지 않게 놀란 모습을 최대한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 뭐야 왜 못 보여준다고 한거야, 예쁘기만 하구만! 깔깔 웃고 우리는 돌아나와서 정말 많이 울었다.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버린 팔다리와 만삭 임산부처럼 복수가 차올라 있었다. 내가 알던 친구의 얼굴은 더이상 없었다. 최대한 티내지 않고 먹고 싶다던 것들을 바리바리 사갔다. 그동안 먹지 못했던 따뜻한 라떼도 사갔더니 오랜만이라며 조금조금 반잔을 겨우 마셨다. 우리는 친구 앞에서 일부러 더 웃고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들을 떠들었다. 그리고 친구가 힘들지 않게 한시간 남짓을 보내고 방에서 빠져 나오곤, 친구와 먹었던 음식들이 구역질과 함께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랬다, 충격적이었다. 나는 일찍이 가까이서 암환자를 본 적이 없고 아픈 사람을 곁에서 볼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이렇게 어린 내 친구가, 새하얀 치아로 우릴 향해 늘 웃어주던 친구가 암에게 침식 당해 몸이 변하고 있었다. 우리가 아는 모습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 날부터 나는 회사를 다니면서도 일주일에 한 두번은 꼬박꼬박 친구를 보러 갔고 매일 안부를 카톡으로 나눴다. 친구도 아픔에 대한 이야기 없이 그저 우리와 일상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니가 얼마나 두려웠을지, 아팠을지 우리는 지금도 모른다. 그래도 너는 그 힘든 와중에도 웃고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선물하고 최대한 우리와 평범한 일상을 나누고자 노력했는데 그 노력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우리는 평생 다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겠지. 친구는 결국 가족이 있는 곳 근처의 대형병원으로 내려갔고 친구는 우리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어했다. 우리는 병원에 피자, 치킨 같은 말도 안되는 것들을 사갔다. 평범한 우리의 시간을 위해서. 으레 갓 서른들이 생일날 먹을 만한 것들을 사 들고 가서 신나게 케이크를 불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친구는 처음으로 피자 한 조각을 다 먹었다. 생일 선물로는 식물 액자를 선물로 주었다. 새롭게 시작한 작은숲 이라는 내 회사 이름을 떠올리니 이것을 주고 싶었다며.
친구를 만나고 돌아올 때 마다 내가 허투루 보낼 앞으로의 수많은 날들을 떼서 노나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살이나 찌는 몸을 걱정하는 우리와 암이라는 덩어리에게 침식 당하는 너. 이대로 가다가 숨을 못 쉬게 될까봐 두렵다고, 그냥 교통사고로 죽는게 낫겠다던 너. 그런 말을 들을 때는 무력하게 쏟아지는 모진 비를 온 몸으로 맞고 있는 기분이었다.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초라하고 나약하게 느껴졌다. 그럴 때면 더욱 아무렇지 않은 카톡을 보내고 목소리를 들었고 너를 보러 갔다.
같이 할머니가 되자고 했더니 친구는 아줌마도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남편과 싸운 이야기를 투정 부리면 죽고 사는 문제 아니고선 화내시지 말라고 전해달라며 내 친구는 또 웃었다.
의사가 아무래도 오늘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며 가족들을 부르라고 했단다. 그 현실감 없는 말을 의사가 했을때도 내 친구는 말라가는 몸과는 반대로, 정신만은 또랑또랑하여 자신을 보러 온 아버지한테 소리를 지르고, 가까이 살던 친구가 병실에 들어오자 악을 썼다고 했다. “왜! 병원에서 나 죽는다나?!! 왜 다 들어오는데! 나가!” 하면서 소리소리를 질렀다고, 병원에 다녀온 친구가 전화가 와서 내내 울었고 우리는 그 밤을 설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 4시쯤, 두려운 벨 소리가 울렸다. 친구 언니한테 전화가 와서 현지 간다고 인사를 하라고 하셨다. 육두문자가 내 입에서 쏟아졌다. 이년아 살거라며, 믿으라며. 야 일어나 뭐하는 짓이야. 원망의 소리를 실컷 뱉다가 최현지, 사랑해, 사랑하는거 알지? 사랑한다, 사랑해. 이야기를 수십번 해주었다. 잘 가, 이제 아프지마 라고 인사를 했는지 안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고나면 정말 끝일까 두려워 말을 못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내 친구는 8월 4일날 새벽 4시에 고단한 몸을 내려놓고 정말로 우리 곁을 떠나 훨훨 날아갔다. 나중에 장례식에서 들었는데 우리 목소리를 듣는 그 시간동안에 꺼져가던 심장 박동이 3-40으로 올라갔다고 했다. 언니는 말했다. 너희 목소리 다 듣고 갔을거야, 라고.
친구가 갔다는 소식을 듣고 새벽 첫 기차를 타고 친구에게로 갔다. 이미 죽은 내 친구에게,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를 만나러 기차를 타고 갔다. 병실 앞에서 덜덜 떨리던 몸과 마음이 생각난다. 나는 지금 친구를 만나러 왔는데 내 친구는 지금 살아있지 않다. 우리는 이승과 저승, 이쪽 저쪽에 나뉘어져 있고 지금 남은건 내친구를 너무나 아프게했던 그 몸만 저기 누워 있을거라 생각하니 도저히 붙잡은 문고리를 돌릴 자신이 없었다. 겨우 병실 문을 열자 언니가 물었다. 민정아, 너 볼 수 있겠어? 라고. 어머니께서 현지야, 민정이 왔어 하며 또 우셨다. 또다른 친구 하나는 먼저 도착해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누워있는 친구의 이마를 하염없이 쓰다듬고 있었다. 최현지 예쁘네, 하며. 너무 무서웠다. 가까이 갈 엄두가 안 났다. 키가 170cm이던 멋진 몸매와 예쁜 미소의 친구는 온데간데 없고 작고 앙상하게 바싹 타들어간 것 같은 내 친구가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우리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병실에서보다 훨씬 앙상해져 있었다. 나중에 언니 말씀엔 살이 빠지다 빠지다가 더 빠질데가 없으니까 손바닥에 있던 살도 다 마르더라 하셨다. 그랬다. 병원 직원들이 출근해서 친구를 데려가기 직전까지만 친구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이대로 보낼 순 없었다. 친구 손을 붙잡았다. 온기가 하나도 없이 차가운 살갗이 그렇게 낯설수가 없었다. 단단했고 차가웠고 생동감이 없는 사람의 손은 처음이었다. 그게 내 친구라니, 지금도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는다. 그 날의 일은 내게 트라우마가 되어 공연장에서 병원씬이 나오는데 졸도할 것처럼 울어재끼기도 했다. 이런 경험, 누구도 없겠지, 없어야만 하고.
내 눈앞에 온기를 잃은 친구가 누워 있다. 몸은 여기에 있는데 내 친구는 없다. 장례식장에서 친구의 입관을 고민 끝에 들어갔다. 친구의 얼굴을 하얀 보자기로 덮고 싸는데 살면서 그렇게 까지 무서운 것도 본 적이 없었고 그렇게까지 울어 본 경험은 정말 없었다. 하얀 무명 보자기를 얼굴에 씌우기전 병실에서도 친구 얼굴을 하염없이 쓰다듬던 내 친구는 입관에서도 친구 이마를 자꾸만 쓰다듬었는데, 자꾸 친구의 눈이 떠졌다. 장례사가 얼굴을 만지지 말라했다. 장례사가 함부러 알록달록하게 해놓은 화장을 보며, 최현지 보면 진짜 욕을 욕을 할텐데 하고 우리는 시뻘겋게 불어터진 눈으로 웃기도 했다.
그 날 이후 우리는 가슴 한구석이 그저 뚫린 채 살아간다. 이 친구들 없이 살아온 날보다 이 친구들과 살아온 날들이 길었을 때 였다. 우리는 자주 전화해서 그냥 가만히 울기도 하면서 시간을 흘려 보냈다. 엉엉 울다가, 끊고, 이 날은 얘가 울고 며칠 뒤엔 쟤가 울고, 그리고 다같이 울고. 그렇게 살았다.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우리는 이제 제법 담담해졌다. 친구는 자기가 제일 싫다던 8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1월 6일 친구의 기일날, 나는 내 임신을 알게 되었다. 천사라도 하나 점지해서 보내준 건가, 싶다. 너 김민정 아들로 제격이다, 하며 골라 보내준 것처럼 아들과 나는 합이 잘 맞다. 죽음과 생명이 나를 휩쓸었던 해였다.
그 날, 친구 인스타에 댓글을 남겼다. ‘현지야, 조카가 생겼어’ 하고.
나의 아들은 무럭무럭 자라 이제 여섯살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제법 담담하다. 유골밖에 없는 친구의 묘소보다는 늘 친구 어머니를 뵈러 갔다. 니가 바라는 것도 이게 아닐까 해서. 나중에는 우리 아들 제법 자라면 같이 가서 소개도 시켜줄게. 엄마 친구야, 너무 소중했던 친군데 하늘나라에 먼저 갔어 하고 꼬옥 인사시켜 줘야지 생각한다. 친구의 생일날과 기일날에는 여전히 눈물이 많이 나는데 꿈에 나올까봐 무서웠던 (그 와중에도 무서워하는 마음도 미안했다.) 마지막 그 모습은 이제 잘 기억이 나지 않고, 다시 해사하게 웃는 친구의 모습만 우리에게 남아, 너는 여전히 서른살에 머물러 있다. 20대에, 아니 10대 모습 그대로 우리 기억에 남아 우리는 늙겠지만, 너는 청춘에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