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rning Rum
어떤 술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그 술이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기준, 즉 규제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러한 규제는 단순한 제약이 아니라, 해당 술의 정체성과 품질을 보장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일정 수준의 규제는 생산자들이 지켜야 할 기준을 설정하면서도, 그 틀 안에서 각자의 방식과 해석을 드러낼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같은 조건 아래에서도 증류 방식, 숙성 환경, 블렌딩 철학 등에 따라 서로 다른 개성이 나타나는 것이 술을 공부하는 재미 중 하나다.
결국, 규제는 생산 방식을 통제하는 동시에 그 술만의 고유한 특징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장치라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지리적 표시제(GI, Geographical Indication)이다. GI란 특정 지역에서 유래한 상품이 그 지역 특유의 품질, 제조 방식, 또는 명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장하는 표시다. 예컨대 꼬냑은 프랑스 꼬냑 지역에서 자란 포도를 증류한 브랜디로, 정해진 지역과 공정을 충족해야만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 버번은 미국 연방법에 따라 옥수수를 주원료로 하여 특정 조건 하에 증류 및 숙성된 위스키에만 붙는 이름이다. 마찬가지로 "Jamaica Rum"이라는 명칭 역시 자메이카 럼 GI가 정한 기준을 충족해야만 사용할 수 있다.
2024년, 자메이카 럼의 GI 규정이 개정되었다. 이 개정은 단순한 행정적 조치가 아니라, "자메이카 럼"이라는 이름의 정체성을 둘러싼 정의를 다시 설정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 배경에는 자메이카 내 주요 증류소들 간의 의견 충돌과 법적 분쟁이 있었다.
이 법적 분쟁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2020년, NRJ(National Rums of Jamaica)가 자메이카 럼 GI 개정안 신청을 JIPO에 제출했다. 여기서 NRJ는 Clarendon, Long Pond 두 증류소를 소유한 자메이카 국영 럼 생산 회사이며 JIPO는 자메이카의 지식재산청이다.
(2) 2023년, SPA(Spirits Pool Association)이 이에 반대하며 다른 개정 신청안을 제출한다. SPA는 자메이카 럼 업계를 대표하는 협회이다. 이들은 자메이카의 주요 증류소들의 공동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이다.
(3) 2024년 2월, JIPO가 양측에서 제안한 개정안을 종합하여 새로운 자메이카 럼 GI를 내놓았다.
(4) 이후 NRJ가 이에 반발하여 법정 소송을 제기했다. 첨부한 사진은 이 법적 소송에 대한 판결문의 첫 페이지이다.
정리하자면 NRJ와 SPA간의 대립이며, Appleton과 New yarmouth 증류소를 소유한 J.Wray&Nephew도 이해관계자로 참여했다.
2024년에 JIPO에서 승인한 자메이카 럼 GI의 핵심 내용의 첫 번째는 발효에 대한 것이다. 발효는 알코올을 얻기 위해선 필수적이며, 이 핵심 공정의 주인공은 효모이다. 개정된 GI에선 기존 Saccharomyces 효모 외에도 추가로 Schizosaccharomyces와 자연 발생 야생 효모를 공식적으로 허용했고, 이 조항은 양측의 합의 아래 최종 판결에서도 유지되었다. 또한 지역 미생물 사용을 허용했는데, 이는 전통적인 "muck pit" 방식이 명시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그리고 유전자 변형 효모의 사용을 금지했다. 두 번째는 첨가물이다. 기존 GI에는 첨가물에 대한 명시가 없었으나, 개정안에는 "완성된 럼에는 물과 사탕수수 캐러멜 외에 어떠한 첨가도 허용되지 않음."이라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세 번째는 이 분쟁의 주요 내용인 "숙성"에 대한 것이다. 술을 배럴(barrel)에 넣어 숙성하는 것은, 그 숙성 위치와 배럴의 종류 및 크기가 핵심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번 개정안에는 이 두 가지 모두에 제한을 걸었다.
-숙성은 반드시 자메이카 국내에서만 가능하다. 더 이상 해외에서 숙성된 럼은 "Jamaica Rum"이라는 GI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
-숙성 용기는 식품 등급의 목재 배럴이어야 하며, 배럴의 용량은 250L를 초과할 수 없다.
배럴 용량에 상한을 둔 것은 ex-bourbon cask 사용을 표준화하고, 셰리(sherry)/마데이라(madeira) 숙성에 주로 쓰이는 대형 캐스크(일반적으로 500L 이상)의 사용은 원칙적으로 배제하려는 조치로 보인다. 이는 전통적 유럽식 숙성 스타일과의 단절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런데 NRJ가 이에 반발한 것이다.
이 개정안에 대해 NRJ는 강하게 반발했다. 오랜 기간 자메이카에서 증류하고 해외에서 숙성하는 방식을 이어온 NRJ는, 이제 와서 숙성지를 자메이카로 한정하면 사업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또한, 자메이카 럼의 명성이 꼭 숙성지에만 있는 것은 아니며, 해외 숙성 역시 자메이카 럼의 역사적 일부라고 강조했다. 그 외에도 250L 초과 숙성 용기 허용과 다양한 수원 사용 허용, 하이 에스테르(high ester) 럼 생산 시 박테리아 사용의 허용을 요구했다.
SPA는 자메이카 럼의 본질은 열대 숙성, 석회암 수원, 작은 오크통이라는 세 가지 기둥 위에 서 있다고 반박했다. 해외 숙성을 허용하면 품질 통제가 어려우며 결국 'Jamica Rum'이라는 이름은 점점 의미를 잃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JIPO는 최종적으로 자메이카 럼은 반드시 자메이카 국내에서 숙성되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NRJ가 요구했던 해외 숙성 허용이나 기타 수처리된 물 사용, 500L 이상의 대형 배럴 허용 등의 요청은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단, 발효 효모의 범위를 확장하는 안은 채택되었다. 하지만 이미 해외에서 숙성 중인 럼이 많은 NRJ 측이 재고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면서, 법원이 실질적인 전환 기간으로 최대 24개월간 해외 저장 중인 럼에 대해 예외적으로 GI 인증을 받을 수 있도록 유예 조항도 포함되었다. 이로써 자메이카 정부와 SPA는 'Jamaica Rum'이라는 이름의 정체성을 명확히 규정했다.
자메이카 럼 GI를 둘러싼 법적 분쟁에 대해 알아봤다. 자메이카 럼을 규정하는 일에는 이처럼 산업적 현실과 문화적 가치가 공존하며 충돌한다. 하지만 'Jamaica Rum'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지키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GI의 개정은 그 명칭이 담고 있는 정체성을 더욱 분명하게 한 조치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숙성에 대한 규정은 GI 개정의 핵심이었다. 숙성은 단순히 지나면서 향이 부드러워지는 과정이 아니다. 숙성 중 배럴은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기후, 온도, 습도 등 수많은 요인에 따라 술의 성격을 서서히 만들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자메이카에서의 숙성'은 단순한 지리적 조건이 아니라, 자메이카 럼이 Jamica Rum일 수 있게 하는 마지막 핵심 단서라 할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자메이카 럼을 규정하는 법적 기준과 그 배경에 대해 살펴보았다. GI라는 틀 안에서 자메이카 럼은 '자메이카에서 만들어졌는가'라는 지리적 조건만이 아니라,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라는 방식까지 함께 정의된다. 하지만 자메이카 럼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법적 기준만이 아니다. 다음 글에서는 자메이카 럼의 향미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과 발효, 증류 공정에 대해 이어서 다룰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