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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보람 Dec 19. 2022

여전히 커피는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카페엔 아메리카노만 있는 게 아니죠!

붉은빛의 히비스커스. 내가 일했던 카페에서는 티백을 따로 담을 수 있는 작은 잔을 함께 내어주었다. 



 어느 해의 5월, 나는 면접에서 약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지금은 없어진 한 복합 문화공간에 입사하게 된다. 어마어마한 수의 경쟁자들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전혀 합격할 거란 생각을 못했다. 막상 가보니 2달 뒤에 문 닫을 예정인 곳이어서 내가 할 일이라곤 시간에 맞춰 문을 여닫고, 공간을 정리하고 이사할 준비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곧 공간이 문을 닫게 되면서 나는 7월부터 다른 곳으로 근무지를 이동하게 되었다. 역시 인근에 있었고, 서울을 내려다보기 좋은 아주 높은 언덕배기에 위치한, 공연과 전시를 모두 진행하는 복합 문화공간이었다.



   하지만 그곳도 유례없는 전염병으로 공연은커녕 전시를 관람하러 온 관람객도 공간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계약기간이 남아있어 일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은 좋은 거지만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이 낭비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입구의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앉아 사람들의 체온과 방명록을 작성하게 하는 일이었다. 물론 이 시국에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내겐 무의미했다. 나는 천천히 다른 곳으로 이직할 준비를 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는 게 너무 아까운 이 시간에, 배우는 것 없이 버티는 것은 나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공간의 3층에는 카페가 있었고 카페의 한편에는 큰 책장이 있었다. 1층에서만 방문객 안내만 하던 내가 3층에 처음 간 날, 큰 책장을 사이에 두고 두 명의 바리스타는 서로가 보이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느 날 팀장님이 나를 불러 앉은자리에서, 팀장님은 바리스타 두 사람이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다. 여전히 그때의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그들의 감정의 골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져 한 명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한 상황이었다. 7월 14일, 회사에서는 내게 카페에서 근무하겠냐는 제안을 했고, 지금껏 모르던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었기에 나는 일말의 머뭇거림 없이 수락했다. 7월 15일, 카페 근무가 시작되었다.

 


   나는 평소 카페에 잘 가지 않는 사람이다. 가장 저렴한 메뉴인 아메리카노는 너무 쓰고, 다른 메뉴들은 물을 마시는 것보다 더한 만족을 주지 못했다. 지인과의 약속이 아니면 카페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나의 일터였다. 메뉴판에는 내가 평소 주문하지 않는 메뉴들이 가득해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일주일 중 하루는 오픈부터 마감까지 전부 혼자 해야 했기에 일을 빨리 익혀야 했다. 처음 혼자 풀타임으로 일 하던 날, 레시피를 모두 익히지 못한 나는 재료가 없어서 아메리카노 외에는 주문이 어렵다는 말만 반복해야 했다. 이렇게 내가 무기력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 해온 직장생활로 사무실에서는 눈치 백 단이 됐지만 카페에서는 초보의 그림자가 진득하게 따라왔다. 같이 일하는 바리스타가 일 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두고 반복해 보면서 일을 익혔다. 혼자 일하는 날은 식사할 시간도, 정신도 없었다. 같은 루틴을 반복하다 보니 그렇게 6개월이 아주 빠르게 지나갔다.



   아직도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메리카노는 쓰디쓴 두근거림과 함께 나를 여전히 힘들게 한다.
 손님만 오면 두 손을 꼭 쥐고 '아메리카노'만 되뇌던 나는 이제 10명이 모두 다른 메뉴를 주문해도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손으로 익힌 수많은 레시피의 흔적은 커피를 모르던 이전과 다르게 내 생활과 나의 세계를 그윽하게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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