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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보람 Jan 26. 2023

없어서 알지 못했던 '내 공간'의 쓸모

부모님 집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

   "네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있으니까 좋다. 네 취향을 알겠네"



   내 방에 처음 왔던 고등학교 동창이 했던 말이다. 이 친구는 대구의 부모님 집에도 온 적이 있었지만 그땐 내 방이 없어서 거실에서 피자를 먹으며 TV를 보다 집으로 돌아갔다. 친구에게 소개해 줄 나의 공간이 없었다. 동생과 함께 썼던 방이 있었지만 어느새 그 방은 동생의 드레스 룸이 되었고 나의 침대는 거실 소파였다. 입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에도 거실 탁자에서 공부하다 바로 뒤 소파에서 잠들어버리기 일쑤였다. 3개의 방은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동생이 하나씩 나눠가졌다. 남은 한 개의 방도 아빠의 서재 겸 창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집의 첫째인 나의 공간은 없었다.



   평생 내 방이 없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할 땐 동생의 방을 이용했다. 내가 썼던 교과서와 교재, 그리고 한때책꽂이를 점유했던 모든 것들은 오직 아빠의 의도로 다 폐기 처분되었다. 나의 동의 없이. 물건을 둘 곳이 없으니 자연스레 소유하지 않게 되었다. 남들은 나에게 검소하게 산다고 했지만 진짜 이유는 '둘 곳이 없어서'였다. 물건을 소유하지 않으니 어떤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집에서도 내 것이 없고 모든 것을 같이 쓰거나 빌려 써야 하는 것은 애정을 허용하지 않았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의 나는 항상 건조하고 이유는 몰랐지만 늘 은은히 화가 나 있었다. 집이라는 것, 가정은 돌아갈 곳이라는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명제였다.



   그래서 나만의 공간을 가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내 공간이 없으니 나의 취향으로만 가득한 공간을 만들 수 없고, 취향이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늘 조금이나마 공간을 덜 차지하는 몇 벌의 옷을 돌려 입고, 신발은 용도별로 딱 한 개 씩만, 화장품도 딱 파우치에 넣어 휴대할 수 있는 정도만 소유했다. 항상 지갑과 핸드폰만 있으면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아도 걱정되지 않았다.



   '내 공간'의 쓸모는 어쩌다 만나게 된 셰어하우스의 1인실에서 찾게 되었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시절, 서울에서 머무르길 원했지만 항상 비용에 가로막혔다. 부담을 줄이기 위해 들어간 셰어하우스지만 모난 곳이 많았던 나는 가장 비싼 1인실을 선택하게 되었다, 여행용 가방에 옷만 담아 처음 방에 들어간 날, 문을 닫고 둘러본 방은 잘 정리되어 있었지만 전 세입자의 사진으로 장식된 문엔 그녀의 흔적이 흠뻑 남겨져 있었다. 나는 그 사진들을 하나하나 떼어 봉투에 넣고 전 세입자에게 돌려주었다. 그녀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사진이니까. 



   나 혼자 공간을 차지한다는 느낌이 좋다. 그게 굳이 내 명의로 계약된 공간이 아니더라도. 지난달 삼일로창고극장에서 봤던 <씨어터로이드는 아카이브양의 꿈을 꾸는가>는 관람자 1인 혹은 2인이 무대와 객석이 모두 치워진 삼일로창고극장에서 태블릿 PC로 증강현실 기술을 직접 체험하는 공연이었다. 나는 운이 좋게 혼자 관람할 기회를 얻었고, 이 넓고 조용한 공간을 단 30분이지만 혼자 점유할 수 있었다. 조용하고 텅 빈 공간은 계속 내게 말을 걸어온다. 여기엔 어떤 이야기를 덧입힐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고.



   언젠가 나 혼자 살던 집에 동생이 와서 "모델하우스 같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 그땐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필수적인 가구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었다. 독립 후 보낸 시간이 쌓이면서 빈 집에 덧댄 내 흔적이 나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이제는 책장도 두 개나 있고, 방의 한가운데엔 다른 사람들과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는 작은 탁자도 있다. 내 색깔로 채워진 공간은 나를 위한 포근함이 가득하다. 가족들로 가득 찬 집에는 없는 텅 빈 포근함. 나의 자유로운 의지로 메꿀 수 있는 이 공백이 나는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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