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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보람 Jan 22. 2023

세상 가장 애틋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 밖엔

   2021년 4월 4일 오후 3시경, 갑자기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잠깐만 전화 좀 받아 봐"


   "아 왜?"


   "네가 할머니한테 (서울) 간다고 얘기 안 하고 가서 할머니가 화났잖아"



2일 저녁 대구의 고향집으로 내려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다 4일 아침 일찍 서울로 돌아왔는데, 집을 떠날 때 인사를 안 하고 가서 할머니가 화가 났다고 한다.



   "니는 가면 간다고 말도 안 하고 올라가나!!"


   "아니 할머니 그때 시간이 너무 일러서..."


   "내가 그때 안 자고 있었는데!!!"


   "다음에는 꼭 인사하고 올라갈게요"



   2021년에 아흔이 된 우리 할머니는 보통 할머니가 아니다. 짙은 쌍꺼풀과 큰 눈을 가진 할머니는 파마와 염색을 주기적으로 하며 내 동생이 새로운 옷을 살 때마다 유심히 살펴본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아름답고, 본인을 가꾸는 데 지치지 않는다. 인자함, 친절함으로 대표되는 이미지의 할머니들과는 다르게 본인이 아닌 타인에게는 불친절하며 성격이 매우 급하고 자식들에게도 툭하면 화를 낸다. 고모들에게도 친정 엄마의 포근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뚝뚝하고 까다로운 엄마다. 평소 인상을 팍 쓰고 사람들을 대하면서도 늘 화장을 하고, 옷장에 가득한 옷들이 본인에게 어울리는지 항상 주의를 기울인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가 만나면 늘 안아주고 환하게 웃으며 반기는 사람이 있다.



   어느 날 그 이유가 궁금해진 아빠는 할머니에게 질문했고 할머니는 이렇게 답했다.


   “엄마는 왜 보람이가 그렇게 좋아?”


   “‘첫 정’이라, 첫 정”



   약 36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와 가족들은 강원도에서 대구로 왔다. 대구에서 자리 잡은 아빠는 엄마를 만나 결혼하고,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의 어머니, 이모할머니(할머니의 동생), 그리고 엄마와 아빠는 한 가족이 되었다.



   가족들이 모두 자기 자리에서 평화롭던 그때 선물처럼 내가 태어났고, 할머니가 처음으로 정을 준 사람, ‘첫 정’이 되었다. 내가 4살이 되었을 때쯤 두 분의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친할머니만 남아 나, 연년생인 동생을 홀로 돌보기 시작했다. 홀로 두 아이를 보는 것은 버거운 일이다. 특히나 예순이 넘은 할머니에게는 더욱 그랬다. 할머니의 돌봄 노동은 정확히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 자연스럽게 끝나 다시 본인의 삶을 되찾았다.



   할머니가 여든이 넘어가면서 평소 걷기 운동으로 다져진 건강을 자신했던 할머니는 병원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평소 할머니의 일과는 노인복지관의 프로그램을 수강하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노인복지관에 갔던 할머니가 갑자기 집으로 전화를 해 태연한 목소리로 주민등록증을 병원으로 가져오라 길래 헐레벌떡 뛰어갔더니 빙판길에 넘어져 손목 골절로 수술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수술이 끝나고도 바로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생떼를 쓰며 화내는 할머니를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그 후로도 할머니는 크고 작은 질병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신기한 건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심하게 아팠던 때는 꼭 내가 일을 하지 않고 쉬고 있는 때였다. 그렇다 보니 그때마다 병원에 출퇴근하며 할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낸 건 나 밖에 없었고, 할머니의 독한 병원살이(?)를 견뎌내며 아프고 힘든 순간을 같이 버텨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더 애틋한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다.



   할머니의 하루는 나의 하루와 비교할 수 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시간을 붙잡을 수 없지만 할머니에게 고마운 마음을 다 돌려줄 수 있는 날까지 함께하고 싶었지만, 할머니는 아흔이 된 2021년 6월에 췌장암 진단을 받고 딱 1년이 지난 2022년 6월 8일에 하늘로 돌아갔다. 아빠는 할머니가 송해 할아버지와 같은 날 돌아가셔서 가는 길이 심심하진 않을 거라고 했다. 오늘은 할머니가 없는 첫 설날이다. 아직 할머니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려서 힘들다. 주워 담을 수 없는 마음을 눈물과 함께 그냥 흘러가게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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