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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보람 Feb 03. 2023

언젠가는 공주가 될 줄 알았지

 

  ‘팡’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집에 단 한 대뿐인 금성의 15인치 TV는 잠시 회색빛이 되었다가 금세 여러 가지 색깔을 화면에 올려놓았다. TV는 우리 집의 세대주인 할머니 방에 있었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전원일기, 아빠가 좋아하는 9시 뉴스, 엄마가 좋아하는 드라마, 나와 동생이 좋아하는 만화가 모두 그 작고 뚱뚱한 전자제품 하나로 다 해결되었다. 온 가족의 취향을 책임지는 그 신통방통한 것. 식사 시간이 되면 옻칠한 나무 밥상의 4개 다리를 펴고, 부엌에서 동그란 접시 위에 반찬을 담아 밥상 위에 늘어놓고 5명의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젓가락을 부딪친다. 각도는 다르지만, 고개는 모두 텔레비전을 향했다. TV를 중심으로 한 가족 공동체는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리모컨 전쟁’ 같은 말로 표현되는 시간에 참전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학원에 가지 않고 집에 조금 일찍 오는 날은 만화를 보려고 하면 <6시 내 고향>이 방송돼 리모컨을 뺏기고 말았다. 리모컨은 그때 모인 구성원에 따라 우리 집의 최고 권력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었다. 누군가의 노력이 있어야 식사를 할 수 있었던 어린 나와 동생은 언제나 위계보다 밥상과 가까웠다. 



   어린이에게 늦잠이 간절해지는 날이 있다. 학교에 가지 않는 일요일이다. 주 6일 등교하는 어린이에게 일요일은 아침부터 어린이를 두근거리게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바로 디즈니 만화 동산! 매주 일요일 오전 8시 30분이면 부모님의 손에 끌려 교회에 가야 했던 나와 동생은 한 번도 디즈니 만화 동산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일요일 아침, 늘 책에서 캐릭터들이 튀어나오는 그 오프닝 영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모님의 고함과 마주해야 했다. 본 날보다 못 본 날이 더 많아 슬픈 그것. 디즈니 만화 동산은 그렇게 월요일 친구들의 대화 속에서 존재했다. 평일에도 부모님이 없는 날이어야 만화를 몰래 볼 수 있었다. 하물며 우리 자매뿐 아니라 모두가 기다리던 일요일이야 두 말할 것 없었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우리 자매를 돌본 건 애니메이션이었고 비디오였다. 우리 자매에게 한 번 빌려온 테이프는 세 번쯤 보는 게 기본이었다. 그 당시 몇 없던 국산 애니메이션이었던 아기공룡 둘리는 비디오가 늘어지도록 복습했다. 그때 둘리는 친구들과 비디오 8개 분량의 세계여행을 떠났었다. 



   밤이 깊어지면 엄마가 보는 드라마의 아름다운 여주인공처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공주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주인공 백설 공주보다 난쟁이가, 신데렐라보다 예쁘게 변신시켜 준 요정에게 더 관심이 갔던 것도 그래서였던 것 같다. 언젠가는 나를 공주로 만들어 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공주가 아닌 현실의 나는 공감대가 없으면 친구들의 대화에 끼기 힘들었다. 디즈니 만화 동산이나 포켓몬, 디지몬 같은 다양한 TV 애니메이션에 대한 추억을 줄줄이 읊어대면 불쑥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가 기억이 안 나기 때문이다. 뭔가 봤다는 기억은 있는데 뭘 봤는지, 어땠는지 모르겠다는 건 그저 기억력 때문이었을까. 친구들은 더는 둘리 얘기를 하지 않았다. 요즘 어린이들과 얘기할 때도 신데렐라와 백설 공주보다 라푼젤과 엘사를 더 선명하게 기억해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내가 줄줄 외우고 있던 그 공주들도 이제는 세대교체가 되었다니. 



  이제는 원하는 때 언제든지 만화를 볼 수 있다. 굳이 텔레비전이 아니라도 어디서든지 만화를 접할 수 있다. 더는 일요일 오전을, 온 가족이 모인 식사 시간을 애타게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은 더욱더 모이기 어렵다. 신데렐라도 아닌데 여섯 시만 지나면 4명은 2명이 돼야 한다. 얼굴을 맞댈 수 없는 우리는 온라인에서 삼삼오오 모인다. 지금 내 앞에는 6명의 화면이 떠 있고, 모두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절에 관해 얘기한다. 이제는 다른 이유로 일요일을 기다리지만, 가끔 디즈니 만화 동산을 기다리던 어린이가 떠오른다.



(2021년 여름에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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