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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보람 Feb 06. 2023

앞으로 겹겹이 쌓여갈 나의 목소리로 그녀를 잊을까봐

나를 가장 사랑한 할머니의 장례식을 기록하며


   내가 태어난 6월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평생 함께 살았던 나의 할머니, 나를 가장 좋아했던 우리 할머니, 아들 딸 차별 없이 본인이 가장 중요했던 할머니, 가장 고통이 심하다는 췌장암으로 마지막에 너무 아파했던 할머니, 돌아가셨다는 말을 쓰고 있는 지금도 계속해서 눈을 매만지게 된다. 나와 31년을 함께했던 할머니는, 이제 세상 어디에도 없다. 나와 가족들의 기억 속에서만 남아 있는 사람.



   평소 작은 일에도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 사실 잘 와닿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냥 입에서 나오는 습관적인 말이었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중에는 모든 것이 진심으로 감사했다. 코로나를 뚫고 장례식장까지 와 준 모든 사람들에게, 오지 못해도 여러 가지로 마음을 전해준 사람들, 안 보이는 곳에서 할머니의 마지막을 도와주고 떠난 사람들 모두. 할머니의 마지막은 할머니가 좋아하는 꽃이 가득하고 또 사람들도 가득했다.


 

   장례식의 첫 손님은 빈소를 차릴 준비도 다 되지 않았을 때 오신 할머니의 집안 어른이었다. 우리 할머니처럼 고령에 지팡이가 없으면 걷기도 쉽지 않은 분이었지만 부고를 듣자마자 몇 시간도 지체하지 않고 한달음에 달려온 어르신께 죄송함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꼈다. 이렇게 가까이에 계신 분이었으면 할머니 생전에 한 번 찾아뵈었어야 했을 텐데. 



   엄마의 회사 동료들, 멀리 서울에서 대구까지 찾아와 준 큰고모의 교회 교우들, 할머니와 엄마 아빠가 다녔던 교회 사람들, 이전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할머니와 아빠의 친척들,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우리 할머니를 위해 써 준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경사보다 조사가 중요하다는 게 이래서인 것 같다. 



   첫째 날, 사실 할머니가 돌아가셨던 당일 오전에도 교회 목사님이 찾아오셔서 임종 예배를 드렸다. 15시 41분, 임종 후 빈소를 차리고 수요 저녁 예배를 마친 후 교인들과 함께 다시 장례식장으로 오신 목사님과 다시 예배를 드렸다. 화환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들어온 화환은 전부 하나하나 전부 사진으로 찍어두었다. 언젠가 갚아야 할 고마움이니.



   둘째 날, 입관(11시) 전 10시부터 짧게 입관 예배를 드렸다. 이 날도 많은 교우들이 참석해 감사할 따름이었다. 타지에서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다. 음식 주문하고 서명하고 부의금 리스트를 적고 계산하고... 아빠는 이것저것 결정만 하고 다른 일은 엄마와 내가 다 했다. 장례식에는 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엄마는 작은 고모에게 일을 시키려고 했지만 고모가 요리조리 피해 다녀서 어쩔 수 없이 내가 하게 됐다.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우리 할머니 장례를 우리가 치르는 거니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



   4월부터 할머니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5월에는 할머니가 다녔던 주간보호센터를 갈 수 없게 되었다.  5월 12일, 가족들이 모두 나가지 말고 집에서 쉬라고 말렸지만 주간보호센터를 갔다 몸이 좋지 않아 몇 시간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렇게까지 가려고 했던 이유는, 본인의 건강이 악화되기 전까지 할머니를 돌봐주었던 요양보호사 선생님들에게 "그동안 돌봐줘서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둘째 날 장례식장에 찾아온 요양보호사 선생님들께 그 이야기를 들은 동생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동생에게서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는 또 마음이 내려앉았다. 



   셋째 날, 이날도 목사님과 성도들이 찾아와 발인 예배를 드린 후 화장장으로 출발했다. 영정사진을 들고 가면서 맨 앞에서 모든 광경을 보게 됐다. 안치실에서 관을 꺼내고, 들고, 운구차에 싣고... 이 글을 쓰는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때도 수십 번 마음이 내려앉았던 것 같다. 남들처럼 소리 내어 울고 싶지만 사랑니가 너무 아파서 소리 내 울 수도 없었다. 할머니는 생전 여러 가지 색의 화려한 옷을 좋아했는 데, 마지막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 끝까지 화려했던 것 같다.



   눈물이 날 때면 어디선가 할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할머니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은데, 이 목소리를 잊어서 나중에 내가 하늘에 갔을 때 할머니를 알아보지 못할까 봐 두렵다. 



   상을 치른 후 엄마의 동료가 발인할 때 우리 가족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었다.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을 챙겨준 사람이 있어 또 감사했다. 영정사진을 들고나가는 내 양 옆으로 기자들이 줄지어 앉아있는 모습(할머니가 돌아가셨던 바로 다음날, 지역에서 큰 사건이 발생해 희생자들이 우리와 같은 장례식장으로 옮겨져 기자들이 장례식장에 바글바글 했다)도 보이고, 이 순간에도 마음 써 준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감사했다. 



   집에서 할머니의 시간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있다. 할아버지와 함께 있던 시간 동안에는 어렵게 모아 온 돈을 다 할아버지의 술값으로 뺏기고 말았지만 할머니는 본인의 결혼사진은 없어도 동생들의 결혼사진은 소중하게 모아두었고, 생계를 위해 수를 놓았던 시간들을 모아 여자는 더 공부할 필요 없다는 할아버지 몰래 첫째 딸을 고등학교에 등록하고, 결혼할 때는 금반지를 선물했다. 할아버지에 관해서는 할머니를 비롯해 아빠 4남매 모두 좋은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버는 딸들 월급까지 뺏아가며 술을 마시고 가족이 아닌 남들에게만 좋은 사람이었던 할아버지는 50대 후반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할머니의 찬란하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앞으로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미 시작했을 할머니의 새로운 삶이 항상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먼 훗날 나도 함께 그 시간을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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