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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보람 Feb 08. 2023

죄송하긴요

   "죄송합니다"


   지하철 역에 내려 개찰구를 통과하려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내 앞에 불쑥 끼어들었다. 
나는 그가 끼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개찰구에서는 '우대권'이라는 세 글자가 선명했다. 그때서야 나는 그의 손에 든 긴 막대기를 인식하게 되었다. 시각장애인용 지팡이였다.



   "죄송합니다"


   내가 그의 지팡이를 인식했을 무렵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향하다 또 다른 여성과 부딪친 것이다. 지팡이는 노란색 점자블록을 인식한 후 주인을 계단으로 이끌었고 그의 걸음엔 익숙함보다 위태로움이 가득했다. 뒤에서 그를 지켜보던 나는 계단과 에스컬레이터에 무사히 오른 걸 확인한 후 그를 지나쳐 앞으로 걸었다.


   가까스로 계단을 오르고 에스컬레이터를 탄 후에도 난관은 끝난 게 아니었다. 초록불이 깜빡거리는 횡단보도 앞에서 나는 천천히 달려 길 건너편에 도착했지만 그는 시각장애인용 신호기를 누른 후에야 발을 뗄 수 있었다. 뒤돌아 그를 흘끗거리던 나는 길 건너에서 어설프게 달려오던 그가 신경 쓰였다. 다행히 길을 건넌 후 그는 인근 장애인 복지관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나의 고개도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오늘 일은 나에겐 그저 출근길 에피소드지만 그에겐 쉽지 않은 하루였을 것이다. 그래도 또 버텨낸 우리 모두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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