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채운 백수 2주: 저 싫으면 그만이다.
2025년 6월 19일 (목) 백수 7-1 일 차: '저 싫으면 그만'
백수를 온몸으로 실감한 이 날 오후, 공교롭게도 주 교육부에서 평생 교사 자격증을 받게 됐다.
그간 내가 가지고 있던 건 3년짜리 임시 자격증. 무탈히 3년을 채워야 평생 자격증을 받을 수 있는데, 그걸 백수가 된 후 받은 것이다. 이 시스템이 아마도 내가 3년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는지도.
지금은 백수로 지내는 게 좋지만, 언젠가 원하면 다시 교단에 설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문득 이런 속담이 떠올랐다.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
괜스레 우쭐해졌다.
2025년 6월 20일 (금) 백수 8일 차: 직업병
시아버님 생신 파티로 시댁에 갔다가 오랜만에 시조카들을 만났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나도 모르게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어떤 반응을 보여야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까' 고민하는 나를 발견했다.
직업병일까? 치료가 필요한 병일까? 그냥 내가 가진 좋은 본능이면 좋겠다고 바라면 욕심일까?
2025년 6월 21일 (토) 백수 9일 차: 아침 맥주와 백수의 낭만
백수에게도 소중한 주말 아침, 어떻게 하면 잘 보낼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 시댁 냉장고에서 딸기 맥주를 꺼내 들었다. 시아버님께서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며 사다 놓으신 거다. 상큼하게 퍼지는 딸기향의 맥주로 시아버님의 사랑을 느끼며 하루를 시작했다.
언제 또 이렇게 아무 부담 없이 백수로 지낼 수 있을까?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자.
2025년 6월 22일 (일) 백수 10일 차: 자격지심
시댁에서 돌아오는 길에 시조부모님 댁에서도 하룻밤 지내기로 했다. 시조부모님은 우리가 방문하면 맛있는 음식을 사주신다. 이번엔 에티오피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벌이가 있을 때에도 자주 시조부모님께서 사주시는 음식을 먹었었는데,
문득 '이렇게 계속 얻어먹기만 해도 괜찮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드는 감정, 사자성어로 뭐더라?
자격지심.
2025년 6월 23일 (월) 백수 11일 차: 반갑습니다!
지난 토요일 시아버님 생신 파티를 잘 마치고, 시어머니 고양이에게 발을 물리는 사건이 있었다. 응급치료를 했지만 호전되지 않아 결국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 근처 병원에 갔다. 다행히도 내 의료보험은 8월 말까지 적용이 돼 병원비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 있었다. 병원 치료의 하이라이트는 한국인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는 것! 그분이 나에게 처음으로 물은 질문은 “Do you speak Korean?”이었다. 0.1초 내에 “네!”라고 응답했다.어찌나 반갑던지...
여기 미국 학교에서 일할 때도, 한국어를 쓸 수 있었다면 조금은 더 수월했을까?
2025년 6월 24일 (화) 백수 12일 차: 뭐라도 팔아야겠다.
남편과 내가 시댁에 간 사이 고양이들을 돌봐준 이웃 친구가 있다.
고맙다는 인사를 꼭 전하고 싶어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친구에게 감사 표현은 남편과 같이 하는 거지만, 작더라도 내가 하는 감사 표현은 내 소유로 하고 싶은 맘.
고민 끝에, 커뮤니티 페이지에 주말 야드 세일 공지를 올렸다.
2025년 6월 25일 (수) 백수 13일 차: 눈물 나게 몰입한 드라마, 그리고 미안한 마음
요즘 빠져 있는 드라마 ‘미지의 서울’.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나 역시 그런 길을 걷고 있어서일까.
드라마를 보다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괜히 찔려 TV를 끄고 노트북을 열어 온라인 카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백수는... 눈치 보이는 직업(?)이다.
2025년 6월 26일 (목) 14일 차: 백수, 별로
꽉 채운 백수 2주째 되는 날 아침.
잠옷 차림으로 셰이크를 만들어 일과를 준비하는 남편에게 건넸다.
냥이들 화장실을 치우고, 세탁기도 돌렸다.
출근하던 시절엔 항상 정해진 시간에 샤워했는데, 요즘은 어중간한 시간대에 씻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그런데, 그게 마냥 좋지는 않다.
불안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온다.
나는 지금, 그냥 백수인 게 별로다.
<에필로그>: 백수도 내가 원치 않으면 그만이다.
그동안 총 3화에 걸쳐 ‘백수 일기’를 썼다.
사전적 정의로 백수는 ‘만 19세 이상인 성인이면서 직업이 없는 사람’이지만,
한때는 ‘잘 쉬어보는 게 로망’이라 여겼기에
남편 직장으로 인한 이주를 빌미삼아 스스로 선택해서 된 백수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백수’라는 말 자체가 내게 불안으로 다가옴을 느낀다.
그토록 해보고 싶었던 백수였지만,
백수도 내가 원치 않으면 그만이다.
이제, 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다.
그 이름은 ‘캣맘’.
(브런치 작가 직업 소개에 ‘캣맘’ 항목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육아에 온 정성을 쏟는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해 준 백수 2주였다.
덧붙임.
백수 초기에 어찌할 바 몰라 굴러다니게 하던 휴지심들.
고양이 장난감 영상 하나 보고 영감을 받아
방치해 두었던 휴지심을 완벽한 냥이들 장난감으로 변신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