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장이 설교가 아니라 대화가 되길 바란다.

‘삐딱하게’를 듣고

by 붱draw

너무 착하게만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네


너무 훌륭하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네


TV를 봐도 RADIO를 켜도

삐따기의 모습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네


있는 그대로 얘기할 수 있는 삐따기


-강산에 ‘삐딱하게’ 중



어느 한갓진 오후, 유튜브를 떠돌던 중 싱어게인 4의 한 듀엣 영상을 우연히 눌렀다.

신선한 기타 도입부가 귀를 사로잡았다.

두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나는 모니터에 몸을 조금 더 가까이 댔다.


강산에의 ‘삐딱하게’.

익히 알고 있는 노래였지만, 실력파 무명가수들이 듀엣으로 부르는 노래가 매우 신선하게 들렸다.

공연 영상에 자막으로 보여준 가사도 다시 보고 싶어 듣고 보기를 반복했다.


“너무 착하게만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네.

너무 훌륭하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네.”


최근 몇 주간 생각했던 ‘말과 글에서의 과시성’을 가사가 대변해 주는 듯했다.

그 고민을 시원하게 질러주는 듯한 노래에 가슴이 뻥 뚫렸다.



나는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같은 종류의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문장은 수려하지만 숨 쉴 틈이 없다.

마치 이미 모든 것을 아는 사람처럼, 독자를 가르치려 드는 어조 때문이다.


수전 손택의 글도 비슷하다.

탁월함은 분명하지만, 지식을 나눈다기보다 과시하는 듯한 인상이 더 강하게 남는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본받을 만하다.

하지만, '나 이만큼 괜찮은 사람'임을 증명하듯 쓰인 글에 피로감이 느껴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나는 문장이 설교가 아니라 대화가 되길 바란다.


말과 글은 표현이자 소통의 방식이지만, 잘못 쓰이면 오해와 불편을 부르기도 한다.

공감의 글에는 겸손이 필요하다.

그런 글에서, 비로소 자연스러운 배움과 깨달음이 생긴달까.


맹자는 말했다.

“남을 가르치려 들지 말라."


누군가 힘들어 위로가 필요해 털어놓는 자리에서 “나는 잘 살고 있으니, 나처럼 해봐.”라는 조언은, 위로가 아니라 은근한 자기 과시로 들릴 수도 있다.

말의 초점이 ‘힘든 사람’이 아니라, 조언하는 사람 자신의 ‘바른 이미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타인을 위하는 척하면서 자신을 돋보이려는 ‘이미지 브랜딩'을 목격하면, 마음이 금세 서늘해진다.



그렇다면, 마음을 울리는 현자의 말은 무엇이 다를까?


그들의 말과 글에는 스스로를 빛내려는 의도가 없다.

조용한 성찰과 함께 성장하려는 태도가 담겨 있다.

그 바탕에는 늘 이타심이 있다.

그런 말과 글에서, 자연스럽게 배움이 생긴다.


꾸며낸 ‘착함’이나 ‘훌륭함’보다 조용하고 진실한 태도에 마음이 움직인다.

삐뚤어 보일까 두려워 꾸미는 대신, 솔직함으로 자신을 지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말, 혹은 글과 함께라면, 같이 호흡하고 대화하고 싶어진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누군가에겐 또 다른 설교자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심스럽고, 그래서 더 솔직하고 싶었다.


유튜브에서 스쳐 지나갈 뻔한 한 곡이 마음 한 구석 불편한 느낌을 긁어주었고, 내 태도를 되돌아보게도 했다.


있는 그대로 말하고, 삐딱하게 있어도 괜찮다는 가사가 내 마음에 닿아 위로가 되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두 달간의 이사: 정리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