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띵동~”
지금 초인종이 울린다면?
누군가 들르기로 했다면 그 사람을,
기다리던 택배가 있다면 택배 기사를,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면,
‘누구지? 뭐지?’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것이다.
“띵동~”
오전 9시 15분, 아파트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오전 9시 30분이랬는데, 좀 일찍 도착했나 보다.’ 하며
반갑게 문을 열었다.
짐작이 맞았다.
전에 살던 미국 위스콘신 매디슨 집에서 보낸 짐들이
두 달간 태평양을 건너 싱가포르 집으로 도착한 것이다.
“우리보다 일찍 출발했으면서도 훨씬 늦게 도착했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물건들에 감정이 있다면 그렇게 말했겠지만,
우리는 “그 긴 시간 동안 분실되지 않고 잘 도착해서 천만다행이야.”라며
안도의 인사를 대신했다.
이삿짐센터 직원분들이 두어 시간 동안 짐을 하나하나 정성껏 옮겨주셨다.
그분들의 노고에 감사 인사를 드리려는데,
더 할 게 없냐고 재차 물으셨다.
이제는 우리가 알아서 정리할 차례라고 하자,
3일 안에 손상된 부분을 말하면 보험 처리가 가능하니
지체 말고 연락 달라는 말을 남기고 가셨다.
주방과 거실, 방마다 놓인 짐들을 보았다.
버릴 건 버리고, 팔 건 팔고, 나눌 건 나누고, 정리를 제법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렇게 남은 물건이 많다니.
한때 미니멀리즘을 추구했었던 나로서는 난감한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났다
‘아, 이걸 언제 다 정리하지?’
남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옆에 와서 똑같이 한숨을 쉬었다.
무언가에 버거운 느낌이 들 때마다 서로에게 했던 말을
이번에도 했다.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오늘은 주방,
내일은 거실,
내일모레는 침실과 욕실,
삼사일 맘먹고 정리하면
다음 주부터는 휑해서 메아리가 울리던 집이 아니라
집다운 집에서 생활할 수 있을 거라며 서로를 격려했다.
먼저 주방 카운터 위 식기들을 선반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두어 달간 없어도 잘 살았었는데,
하나씩 손에 잡아 보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도착한 식기들에 점심을 담아 먹으며,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신기해, 꼭 매디슨에 있는 거 같아.”
사람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있다.
몇 년씩 연락이 없었어도
다시 만나면 반갑고, 마치 어제 본 듯한 사람.
늘어난 뱃살과 주름을 두고서
과거의 우리로 시간여행을 이끄는 사람.
평범하지만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
그런 몇몇이 머리를 스쳐갔다.
다시 정리에 집중했다.
식기들을 선반에 하나씩 올려놓다 보니
몇 해 전 넷플릭스로 즐겨보던 곤도 마리에의 정리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던데…’
하나씩 손에 들어보며, 이 물건이 나에게 설렘을 주는지 확인했다.
설레지는 않아도 익숙하고 편안한 것들,
그런 물건이라면 가지고 있어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 것들을 선반 한쪽에 가지런히 두었다.
버려야 할 것은 따로 있다.
깨지거나 이가 나간 식기처럼 위험한 것들,
그리고 공간의 분위기와 맞지 않아
볼 때마다 불편한 물건들.
생각을 이어나가다 보니
물건을 정리하는 일이 인간관계와 맞물렸다.
아프거나 불편한 관계는
버리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두는 편이
안락한 삶을 위한 정리인 거라고.
반대로
내가 누군가에게 실수를 했다면
3일 안에 진심 어린 사과를 할 것.
의도치 않았지만 어색하고 멀어진 느낌이 든다면,
3일 안에 연락해서 이상이 없는지,
우리가 나눌 이야기가 있는지 확인할 것.
그것이 관계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이라 생각됐다.
주방 선반이 차례로 정리되어 갈수록
내 마음도 더 개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거실도, 방과 욕실도, 그렇게 하나씩 해 나가면 될 것 같았다.
오래간만에 몸을 많이 움직여서인지
오후에 평소보다 피로가 빨리 밀려왔다.
잠자리에 들기 전, 남편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오늘 어땠어?”
“응 괜찮았어. 언제 다 정리하나 싶었는데, 하다 보니 되네.
근데 우리 여기에 오래오래 살자. 이걸 또 옮길 생각 하면 아찔해.”
“오래오래? 아.. 만약에 내가 해고되면?”
지금 집은 남편 직장에서 저렴하게 임대해 준 곳이다.
현재 외벌이로 부담이 큰 남편의 말에
아차 싶었다.
"해고되지 않을 만큼만 일해.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농담처럼 얼버무렸지만,
더 위안이 되는 말을 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오랜만에 봐도 어색함 없이 편안한 관계가 있는가 하면,
매일 만나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이 편안해지는 관계도 있다.
그런 관계일수록 더 세심하게 챙겨야 하는데,
너무 익숙한 나머지 속에 있는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어 버렸다.
3일 안에 남편의 부담을 덜어줄 무언가가 조용히 내 앞에 오길 바라지만,
세상에 그냥 되는 건 없겠지.
그래도 오늘처럼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정리하며,
그의 짐과 나의 짐이 함께 정리되어 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