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맛있는 밥을 짓기 위한 필요조건

가스를 채우는 일

by 붱draw

싱가포르에서 처음 맞는 음력설을 앞둔 어느 날, 식료품을 사러 마트에 갔다. 붉은말을 형상화한 장식들이 다가올 음력 새해의 기운을 북돋고 있었다. 그 활기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해, 덩달아 들떴다.

음력설을 앞두고 식료품을 사러 마트에 갔다. 붉은말을 형상화한 장식들이 새해의 기운을 북돋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국 마트에 가서 떡국 재료를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말이다.


그날 저녁은 한국 마트에서 사 온 황태채로 황탯국을 끓이기로 했다. 물에 적신 황태를 냄비에 담고, 두 시간 불린 잡곡쌀을 압력밥솥에 넣어 가스레인지에 얹었다. 남편이 먹고 싶다고 노래 부르던 감자전을 만들기 위해 프라이팬도 꺼냈다. 모처럼 가스레인지의 화구를 모두 쓰는 날이었다.


노브를 하나씩 돌려 불을 켰다. 평소보다 화력이 약하나 싶더니, 몇 번씩 불이 꺼졌다. 꺼진 불을 발견할 때마다 다시 돌려, 겨우 저녁 준비를 마쳤다. 남편과 식사하며 내일은 가스통을 교환해야겠다고 말해 두었다.


그날 밤,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가스불이 아예 꺼질까 노심초사했던 탓인지 꿈속에서도 분주했다. 고양이들까지 나를 일찍 깨워,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아침이 되자 남편이 먼저 가스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직원이 와서 새 가스통으로 교체해 주었다. 밖으로 꺼내진 빈 가스통을 보며 생각했다.


‘비어있는 가스통이 달린 가스레인지로는 아무리 애써도 요리를 완성시킬 수 없지.’


빈 가스통이 지금의 나 같았다.


가스 = 실력.


요즘 나는 의지로만 불을 붙이려 하고 있던 건 아닐까.




새벽 그림 모임을 위해 다섯 시에 몸을 일으켰는데, 몸이 무거웠다. 그림도 잘 그려지지 않았다. 스케치를 대략 마무리해 두고, 모임이 끝날 시간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두통이 올라왔다. 일단 낮잠을 청했다. 꽤 깊이 잠들었던 것 같다. 시스코와 데이지도 조용히 옆에 누워, 우리 셋은 대낮에 단잠을 잤다. 일어나니 머리가 맑아졌다.


노트를 펼쳤다.

하고 싶은 건 많았지만 무엇도 시작할 수 없는 상태였다.


지금 당장은 하나만 남기기로 했다.

동화 일러스트를 그리는 것.




미국 공립학교에서 근무할 당시, 같은 학군의 한국인 선생님과 함께 책을 낸 적이 있다. 그분이 쓴 이야기에 내가 삽화를 그렸다. 함께 해냈다는 성취감은 컸지만, 그분이 원하는 방식대로 그려주는 일에 가까워 그림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다. 지금 이어지는 고민들은 그때의 부족함을 채우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방향이 정해졌으니, 이제 그리면 된다. 그리고 싶은 스타일을 찾으려면 실력도 채워 나가야 한다. 방법을 고민하던 중에 오래전에 결제만 해 둔 온라인 미술 강의 플랫폼 도메스티카가 생각났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다지는 동시에, 동화 배경의 공간감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과슈 풍경화 수업을 선택했다.


수업 영상을 켜기 전, 지금의 내 실력을 확인하고 싶어 먼저 채색을 시도했다. 십 분쯤 지났을까, 예상보다 재료를 다루지 못하는 걸 깨달았다. 영상 강의 속 샘플 그림들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색을 섞고, 물의 농도를 맞추는 연습을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왜 잘 되지 않았는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유를 알게 되자, 마음이 가벼워지고 어서 다시 그리고 싶다는 설렘이 생겼다.




새 가스통이 연결된 가스레인지 앞에 섰다. 불이 안정적으로 켜졌다. 같은 주방, 같은 가스레인지인데 전혀 다른 상태였다. 준비되지 않은 채 애써 불을 붙이려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문득, 붉은 장식들로 가득 차 있던 마트가 떠올랐다. 새해를 맞을 준비, 희망을 품은 공간.


오늘도 나는 가스를 채운다.

맛있는 밥을 짓기 위해,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오늘도 나는 가스를 채운다.(종이에 아크릴 페인트 마커)




<세 번째 그림 실험 보고서>


실험 제목: 미래 동화 일러스트 배경을 표현하기 위한 과슈(gouache) 풍경화 연습

도전 과제: 기초부터 차근차근 과슈를 사용해 내 그림 스타일의 현주소를 점검. 미래에 동화 일러스트 배경을 잘 표현하기 위한 연습으로 도메스티카 수강

목적: 실력을 체계적으로 채워 ‘나다움’을 그림에 녹여낼 기반 마련.

가득 차 있는 가스통이 연결된 가스레인지처럼, 준비된 상태에서 원하는 그림을 그릴 조건 만들기.
재료 및 시도: 과슈, 이전에 스케치만 해둔 그림, 도메스티카 온라인 과슈 풍경화 강의 시청.

그림 실험 전: 10분 자율 채색, 예상보다 재료 다루기 어려움 확인.

강의 수강 전·후 채색 비교.

성과: 현재 실력 파악, 발전 가능성 확인, 동화적 공간감 표현, 재료 다루기, 채색 감각 점검, 앞으로의 실험 방향 정립

느낀 점: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을 붙이려는 시도는 한계가 있음,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실력 역시 채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음.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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