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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순만 Mar 23. 2016

이별의 변증법

이별도 선택인가 권리인가

  이별이란 예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충격이 크다. 그런데 짐승처럼 그 예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별은 그런 면에서 예견된 것임을 직감한다. 이에 반에 생이별이 진정 예견되지 않는 맨 살이 베어나간 아픔이다. 통증 또한 그 어떤 것과 비견되지 않는다.

  사별은 죽음 곁에서 방금 살아 있는 사람이 현실의 부재로 존재하는 것이다. 아무리 버티고, 넘어서려 해도 넘어서지 못한다. 그 만큼 충격에서 헤어날 수 없다.

   고통은 시간이 지나도 상처로 남고 어리석은 자는 늙어서야 깨닫는다. 문제는 지금의 문제는 지금 풀어내야지 세월이 지나서 깨달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삶의 대부분의 문제는 어느 것은 선택했는가에 따라 발생한다. 어쩌면 그 선택이 비굴했고 불합리 했다는 것을 나중에 인정한다고 해도 시간을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애별이고, 불교의 4고 중에 하나로 가장 큰 아픔을 이별이다. 보이는 것도 아니면서 느껴지는 실체이고 보고 싶지 않다고 부정해도 보고 싶은 것은 언어가 아니라 마음인 것이다.


 우리의 판단이 늘 옳은 것 만은 아니다. 수없이 자문을 구하지만 정작 귀를 기울이는 그 사람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귀담아 듣는다.

 위태롭지 않은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어떤 잘못이 미래에 나타나 꿈을 짓뭉게 버릴 수도 있고, 무서운 미래의 그 무엇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란 늘 과거와 미래 사이에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 같이 위태로운 것이지만 마음의 위안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나 아닌 누군가-그것이 가족이 돠었든,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그 어떤 존재-가 자신을 수호신 처럼 보호해 줄 것이라 믿을 뿐이다. 그리하여 결국 인간은 그런 믿지못할 인간 때문에 절대자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 믿음과 신앙이 지금의 모든 위태로움에 개입할 것이라 믿는다. 하나님의 섭리 즉 신은 그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절대자라고 인간은 믿는 까닭이고 그것이 있은가 아닌가에 의구심을 저버리고 신앙에 의존한다. 그 신앙이 인간을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인 것이다.

  인간은 외모나 당장 보이는 것에만 의존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실책이나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신앙에 있어서도 증거와 기적에 의존하려 하고 보이지 않는 실체는 믿으려하지 않는다. 그것이 믿음임에도 불구하고.

  이별, 우리는 그 힘겨운 순간에 예고없이 직면한다. 가슴에 멍드는 슬픔에 우리는 노출되어 있고 준비되거나 예견되지 않아도 버티고 견뎌야 한다. 목숨이 살아 있는 한, 죽음을 쉬 맞이할 수 있는 용기가 없어서라기 보다 죽을 만큼 삶의 욕구 또한 부정할 수 없고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생명이든 살아남으려는 속성이 있지만 이별은 늘 숨막이고 가슴을 치고 울어야하는 폭풍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견디어 내는가 하는 여부는 결국 자신의 의지에 달린 문제이다.

 이제 삶의 열의가 있다면 열정에 불을 켜고 목숨을 다해 뭐든 자신을 지켜야 한다. 뭐든 먹어야 하고 스스로의 생존의지를 위해 더러워도 치졸해도 살아남아야 한다. 그것이 삶에게 부여된 사명인지도 모른다.


|이별, 살아있기에 감당해야 할 실존의 몫|


글 김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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