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되지 않는 개인 스토리, 나는 어디로 가는가
[ 개인적인 투덜거림이나 지극히 개관성을 잃은 지루한 일기형식의 글임.]
중국 당나라 때 임제선사가 말씀하신 말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지금 있는 그곳이 진리의 자리이다”
([현종 칼럼]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 중앙일보 (joins.com) 인용)
세입자에게 집 비워달라는 말도 못하고, 집 없는 사람에는 42평의 빈집도 해를 넘도록 그냥 살게 하면서 이젠 스스로 나의 공간을 잃었다.
'요즘에 가게를 비우는 것 만으로 다행이야!'
많은 사람들의 부분한 주장이다. 2억의 고급 레스토랑을 돈으로 발랐지만 가게를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찾기로 결심했다는 내담자의 하소연에 비근하면 내가 가게를 비운 것은 별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비내리는 풍경은 아름답다. 차라리 비처럼 어디로 쓸려갔버렸으면 좋겠다. 나는 어째서 물이 되지 못하지. 나는 너무 지나치도록 생각이 많고 예민하다.
어디로 옮길까 많은 방향에 갈림길에 섰다. 서울. 나는 서울 길을 나돌아 다니며 무지 웃었다. 너무도 공간의 가격이 높아져 버린 것을 보고, 나는 벼락거지가 된 느낌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파트는 팔지도 못했다. 서울이 아니라는 이유로 내가 가난해졌다는 사실이 무지 비참했다. 서울로 가지 못한다는 것 보다 내가 살았던 곳에 내가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99년에 미국에서 귀국할 때만 해도 대출안고 아파트 사는 것이 무리도 아니었는데. 서울 명동거리나 경기도 광명은 모두 권리금이 있었다. 권리금이라. 투자가 작다는 것은 실패할 확률이 적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투자를 안 할 수도 없다.
시골 집, 땅 집, 책이 있는 공간. 한 번 뿌리를 내려서 그 지역을 빠져나가지 않아도 되는 나무처럼.
불면증에 시달렸다. 수면제를 먹고 깨어나서 아주 소중한 지인을 잃었다. 가까운 지인에게 자살을 하겠다고 말을 했고 나는 잠들어 버렸다.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나는 기억이 전혀 없지만 다시는 연락을 하지 말라는 것이 마지막 이었다.
나는 공간을 찾아다녔다. 어쩌면 집을 반경으로 하여 가게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디서 새터를 찾겠다는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냥 그 사람을 따라가 버리겠다는 근자감도 갖고 있었지만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매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일까.
제주도, 한국사람이면서 미국은 가봤으면서 제주도에 가 본적이 없다. 헤어진 여친이 그토록 졸랐던 며칠의 시간을 나는 내지 못했다. 나는 일할 때는 일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단순한 짐승이었다. 머리가 없는 것인지,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안되는 놈은 뭘 해도 안되는 것이다. 뭘해도 되는 사람과 뭘해도 안되는 사람, 나는 분명 후자였던 것 같다. 10년 넘게 아는 지인이 나보고, 두번째 박사하는 것을 존경스럽다고 했다. 난 그건 마치 초등학생이 가방매고 학교만 왔다갔다하면 그냥 주는 거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혼자가 되었다고 해서 하고 싶은 것은 한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었다. 그런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 것인가. 아니다. 현실 속에 나를 끼어맞추느라 분주했다. 전임 교수가 된 동생은 며칠동안 일도 안하고 얼마동안 더 쉬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나의 말에 그럴 수 있다는 것 조차 특권이라 말했다. 아마 그 만큼 교수가 하는 일이 많아서 그런 말을 했을까.
공간은 남자에게 여자이며, 여자에게는 남편이다. 배가 여성명사이고, 땅이 여성명사이고, 조국이, 국가가 여성명사다. 여자는 공간이고 생명이다. 늘 나는 여자에게 버림받았고, 공간에게 버림받았다. 언제까지. 나는 버림받은 존재일까.
초등학교 중학교, 어쨌든 관공서는 나랑 맞지 않았다. 학교에서 일한 것이 그래도 더해보면 4년은 넘을까. 대학생들 부터 교육을 시작했지만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어째서 그리도 싫어했는지. 석사를 마치고, 박사를 마치면 뭐라도 답이 나올 것 같지만 형식에 얽매인 통제에 맞추는 것을 숨막혀 했다. 그런 까닭에 직장생활을 하고 회사에 다니고, 학교 선생으로 일하고, 교수로, 의사로, 변호사로 판사로 될 수 있어도 되도 나는 그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교사는 학교장과 선생들의 감정적 이권에서 지면 안 된다. 높이 간다는 것을 밟고 올라서야 하는 것이고, 그럴 만큼 나는 머리를 굴리지 못했다. 멍청한 것인지 머리가 따라가지 않는 것인지. 능력자들은 따로 있다. 수업을 잘 하는 사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식이다. 미국에서 귀국하고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구청에서 1년 쯤 일했다. 관공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존경스럽고 존경받을 만한 일을 한다. 내가 하지 못한 일을 하는 그 분들은 존경스럽다.
의사는 종일 환자를 돌봐야 한다. 마음이 난다고 훌쩍 어디를 떠난다는 것을 말도 되지 않는다. 오전 9시에 출근했다면 퇴근 까지 꼼짝마라다. 게다가 병원에는 건강한 사람이 올리가 만무하다. 온 통 아프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 그뿐인가 수술을 잘 못하는 실수를 범했다면 병원은 곧 문을 닫아야 한다. 의사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존경받을 만한 고생을 하고, 그만큼의 지적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높이 올라가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고, 책임 뿐 아니라 의무과 직무도 뛰어나야 한다.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면 뭐하나 거기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지 못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떠나야 한다. 더 어울리는 장소를 찾고, 공간을 찾아서.
5. 쓸모없는 공부는 공부가 아니다.
6.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한국에는 여자가 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멍청하거나 매력이 없어서. 이런 상담을 참 많이 했었다. 당신이 참 괜찮은 사람이고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차라리 학교 자체를 다니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초등이든 중든이든. 학교는 나랑 어울리지 않는데 나는 어째서 아직도 학교는 다닐까. 나를 떠난 어떤 사람은 나보고 이런 독설을 퍼부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을 만 하네요!'
저주 같은 말이었다.
돈이 많은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 믿었다. 나의 신념에 금이 가지 않기를.
7. 공간
남자의 거처는 여자다. 그러나 한국에 나랑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우연히 만난 한 여자에게 부탁했다. 한국말도 못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베트남 여자 좀 소개시켜 달라고. 그것이 수준높은 한국 여자보다 나을 거라고. 한국 여자는 수준이 높다. 나처럼 수준 낮은 한국 여자는 없었다. 비좁은 서울의 거리는 지방에 사는 나로써는 숨이 막혀왔다. 어째서 거기에서 살아야 할까. 그런 공간에 가야 돈을 잘 벌 수 있으니까.
8. 일을 하지 말고, 공부도 하지 말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일도 공부도 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시간. 다시 미국으로. 아니면 스웨덴. 아니 아프리카에 가볼까. 맞다. 캘리포니아 있을 때 북카페는 정말 운치스러웠다. 부담스럽지 않는 커피가격에 책이 있는 곳. 아니면, 아주 촌티 난 곳에 가서 책방을 할까. 나랑 어울리는. 당분간 나는 일을 하지 않는다. 멈추어 있는 시간 동안 가고 싶은 곳으로. 원시 시대 처럼 비교하지 않으면 경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평생 헤매다니며 주역을 읽으며 위편삼절하는 것이 나의 길인 듯. 나의 공간은 대체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