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비건' 읽고 떠오른 구 육식주의자의 이런저런 생각들
나는 고기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삼겹살이고, 국이든 찌개든 고기가 곁들여져야 제대로 맛이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기분이 저기압일땐 고기앞으로' 라는 문장에 옳소!! 라며 박수를 날리고, 몸이 피곤할땐 흰쌀밥에 고기한 점이 최고의 보약이라 외치는 인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난 지금은... 잘 모르겠다. 먹고싶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고, 오히려 고기라면 피하고 싶은 생각이 더 든다. 회사 구내식당에는 항상 2가지의 식사가 준비되어있다. 한식과 양식, 둘 중 어디에 줄을 설지 정하는 기준은 고기반찬이 있느냐였다. 지금도 마찬가지기는 하다. 고기반찬이 있는지 보고, 최대한 없는 쪽으로 줄을 서게된다. 친구들과의 약속에서도 고기는 최대한 피하고자 먼저 메뉴를 제안한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최대한 밑반찬 위주로만 식사를 하고있다.
공개적으로 비건이라고 선언한 적은 없다. 솔직히 말하면 그럴 자신도 없다. 정말 내가 평생의 식습관을 고칠 수 있을까? 식욕이 가장 기본적인 요구인데, 내가 그 욕망의 맛을 잊을 수나 있을까- 라는 걱정때문에 단언해서 말할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마음속 깊숙이 고민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타자화의 대척점에 연결이 있다. 연결감은 타고나는 것이다. 고기를 거부하는 어린아이의 흐리지 않은 눈으로 보면 연결은 그냥 보인다. 강아지도 동물, 돼지도 똑같은 동물. 외국인 가사도우미도 사람, 우리 엄마도 같은 사람. 동물과 사람 모두 우리 가족. 아이들의 세계에선 낯섦과 익숙함의 구별은 있어도 차별은 없다. 그러나 사회는 아이들에게 타자화를 가르치면서 타고난 연결감을 말살해버린다. 잘게 조각내 회복 불능으로 만든다. 그래서 모든 연결은 끊긴 연결의 회복에 다름 아니다. 한번 끊긴 연결을 회복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 아무튼 비건
연결감은 타고난다는 말, 어린아이의 눈에는 보인다는 말.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나의 연결감은 언제부터 그리고 왜 끊긴걸까?
알고있었지만, 이제껏 모르는척 외면해왔던 진실을 마주해야하는 이 기분, 갑자기 너무 부끄러워졌다.
공장식 축산 시스템에서 오는 짓밟힌 동물권, 강제임신과 강제출산 강제사육 그리고 대량학살까지. 이 시스템의 잔혹함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글쎄- 밥상 위 고기를 앞에두고 깊이 생각해서 득될 것 없으니 덮어두는 편이었다. 정곡을 찌른듯한 기분. 너도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이 잔혹함, 모두 학습된 결과인 것 알지? 라고 외치는 듯 했다.
학습된 잔혹함... 결과적으로 나는 그것이 잔혹한 일인줄도 모르게, 아니 눈감게 되었다. 눈앞에 있는 이 고기는 그저 밥상 위의 대상일뿐, 나와는 아무런 관계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겠지. 연결감이 말살된 결과다. 끊어진 연결감을 다시 떠올리는 일, 그것은 내가 지금껏 알고왔던 근본이 흔들리는 일이다. 인간-동물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해야하는 변화를 내가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책을 읽다보면 육식주의를 벗어나야하는 이유에대해서는 마음으로도 머리로도 충분히 설득이 된다.(자세한 내용은 책을 읽어보시길..!) 하지만 그렇다고 선뜻 나도 이 운동에 참여하겠다는 말이 망설여지는 이유는 '비건' 이 하나의 도그마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랄까. 한 번 선언하면 돌이킬 수 없는 규정에 얽매이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어쨋든 이것도 하나의 신념이니까.
신념을 가지는 일은 그래서 늘 쉽지 않았다. 비단 이번 뿐만이 아니라, 살아가며 깨우치는 크고 작은 다짐들이 매번 실패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식생활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이런 무게를 저자도 알고 있는지, 아래 구절을 읽은 뒤 나는 일렁이는 마음이 조금 다잡을 수 있었다.
자신을 규정짓는 것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만, 규정을 모두 벗어던지는 방식이야말로 가장 쉬운 길이다. 좋게 보면 자유롭고 유연해 보일지 몰라도, 흔해빠진 무원칙의 편의주의기도하다. 나는 나름의 절도가 있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최소한으로 지키고자 하는 선이 있어야 때때로 나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쩌면 모든 윤리는 최소한의 윤리이다. 적어도~는 하지 않겠어 라는 자세이다. 그 최소한이 점점 커지는 방향으로 살고 싶다. - 아무튼 비건
맞다. 아무런 규정 없이 사는 일은 자유롭고 유연해 보이지만, 이는 무원칙 편의주의을 그럴싸하게 돌려말한것일 뿐이다. 지금 나의 일상생활에는 '선' 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그저 내키는대로 생각이 뻗치는대로 먹고 자고 소비할 뿐.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쉬운' 길이라는 말, 부끄럽지만 동의가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것은, 그렇다고 그 선이 깊고도 넓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는 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선, 모든 윤리는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니 말이다.
나는 아직 비건이라 선언할 정도까지는 못된다. 그러나 이제는 고기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먹기는 힘들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육식 소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습관을 바꿔보려 한다. 내가 먹는 이 고기가, 좁은 공간에서 밀집 사육을 당하고 강제로 번식을 당하며 온갖 기술로 학대를 당하다 결국 고통스럽게 죽어간 종의 하나라는 것을, 떠올리고 떠올리며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밥상은 육식주의 너무 깊게 젖어있다. 찌개에도 고기, 반찬에도 고기, 냉면에도 고기, 피자에도 고기, 파스타에도 고기, 짜파게티에도 고기... 인간은 본디 잡식동물이다. 역사적으로봐도 주로 곡물이나 과일로 배를 채우는 초식동물에 가까웠고, 가끔씩 육식을 한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사냥기술과 도구가 발달하면서 육식 비율이 늘어났고, 공장식 축산을 발명하며 현재처럼 육식위주가 된 것이다. 나도 모르게 길들여지고 학습된 입맛이다. 고기가 최고라는 생각들...
'적어도' 나는 앞으로 무차별적으로 고기를 찾지 않을 것이다. 고기 없는 밥상을 당연하고 감사하게 여기며, 고기를 먹어야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생일에는 고기지! 스트레스 받을때는 고기지! 회식에는 고기지! 오랜만에 봤는데 고기나 먹자! - 와 같이, 마치 당위성처럼 붙는 이 단어들이 얼마나 잔인한 언어인지 되새길 것이다.
한 비건 활동가이자 연구가는 주장한다. 완벽한 비건을 몇 명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다수의 사람들을 더 '비건적' 으로 만드는 것이 사회 전체로 봤을 때 훨씬 효과적이라고. 동물을 살리는데도, 환경을 보호하는 데도, 공중 건강을 위해서도 말이다. 일단 비건-친화적인 사회가 되기만 하면, 실천하기가 점점 쉬워지면서 비건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비건은 내게 정체성이나 명사이기 이전에 형용사이다. '비건적'인 작은 노력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의미를 부여할 수있어야, 비건은 소수자 운동을 넘어서 정말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 아무튼 비건
이 최소한의 윤리가 계속 커져서 결국엔 나도 비거니즘이 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무게를 생각하기 이전에, 내가 만든 이 최소한의 선이 더 좁아지지 않도록, 작은 실천이나마 지속하려고한다. 비건은 정체성이나 명사이기 이전에 '형용사' 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