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위플래쉬」를 보고 (1/2)
「위플래쉬」를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지만, 이 영화를 언제 처음 봤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첫 관람 후 남은 감상을 떠올려보면, 음악영화인 줄 알았으나 스릴러 같은 광기와 긴박함을 느꼈던 것이 기억난다. 수년이 지나 다시 본 「위플래쉬」는 '스릴러 같은 영화였지?'라는 이전의 기억과는 달리 강렬한 드럼 연주와 엄청난 몰입력으로 고양감과 일체감을 선사하는 마지막 연주가 인상적으로 남은 음악 영화였다.
두 번째 감상에서는 어째선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가 떠올랐다. 두 작품이 닮았다기 보단, 내가 두 작품을 보는 관점이 유사했다. 「깊이에의 강요」에서 누가 깊이를 강요하는지 모호하다는 감상을 남겼었다. 「위플래쉬」에서도 성공과 성취를 위해 깊이에의 강요가 느껴졌는데, 내용과 전개가 닮았다기 보단 누가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가 깊이를 강요하고 있다는 인상이 두 작품을 겹쳐보게 만든 게 아닐까.
음알못인 내게 음악이라는 세계는 연주에서 문제를 찾기도 어려운, 뭐가 이상하고 어떤 게 다른지 하나도 모르는 세계다. 극 중 플레처가 문제를 지적하며 아무리 다시 연주해도 내 귀엔 똑같이 들리기만 한다. 그럼에도 까다롭고 예민한 플레처의 요구에 맞추고 연주하는 모든 이들이 수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음악이란 세계엔 완벽함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 그게 아니면 플레처의 세계가 완벽을 추구하는 걸까? 어쩌면 그 미묘한 차이가 만드는 간극과 그 차이를 감지할 수 있는 감각이 플레처라는 인물이 권위를 얻게 된 이유인 걸까. 강박적이고 강압적인 플레처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건 정말 모두가 플레처와 그의 음악을 존경하고 정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걸까?
첫 수업의 시간을 알려주는 순간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플레처는 9시 시작인 수업을 앤드루에게 6시에 시작한다고 말하며, 앤드루가 넘어지고 깨지며 겨우 도착한 교실에서 3시간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티도 나지 않는, 뭐가 틀렸는지도 모를, 잘못인지도 모르겠는 그런 실수를 칼같이 잡아내는 플레처는 학생들을 강하게 압박한다. 사실 뭐가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틀렸는지 알 수 없으니, 잘못을 스스로 고백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권위 있는 교수가 틀렸다니 틀렸다고 수긍할 뿐이다. 극한의 긴장감과 압박 속에서 기어코 음이 틀린 학생을 찾아내 내쫓는 플레처. 잘못을 지적당한 학생은 윽박지르는 플레처 앞에서 흐느끼다가 아무 말도 못 한 채 쫓겨났다. 그 학생은 사실 실수한 사람이 아니었다. 공포에 질려 자신감을 잃은 학생은 더 이상 자신의 자리를 지켜낼 수 없었다. 학생이 잃어버린 건 자신감뿐만이 아니었다. 플레처는 학생들의 음악 세계를 무참히 부수는 사람이다.
그 시간은 정신없이 수업시간보다 3시간 일찍 나와 보조로 앉아있던 앤드루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첫 번째 리허설에서 앤드루의 세계는 철저하게 조롱당하고 짓밟힌다. 알 길 없는 플레처 마음속 템포를 맞추기 위해 앤드루는 자신의 길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방향감을 찾기 위해 조율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계속해서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라고 다그치는 플레처의 목소리, 흐르는 식은땀과 가빠지는 호흡 그리고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긴장감. 나 역시도 이와 비슷한 감정을 알고 있었다. 앤드루의 뺨을 때리며 'Rushing or dragging?'을 연신 반복하는 플레처의 목소리에서 깊숙이 묻어놓았던 그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나는 듯했다. 분노는 나를 억압하는 대상이 아닌, 나를 향한다.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자신의 인정욕구를 채워줬던 인물이 내게 화를 내고 있다. 그런 나로 인해 모든 사람이 멈춰서 나를 기다리고 나를 바라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다. 이런 상황을 태연히 받아들이고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특히나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꿈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말이다. 이 잔인하고 가학적인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꿈을 내려놓고 훌훌 떠날 순 없는 일이다. 그렇게 앤드루가 그동안 공들여 쌓아 올린 음악 세계는 처참하게 붕괴되고 말았다.
플레처는 조 존스가 찰리 파커의 머리 위로 심벌즈를 집어던졌던 일화를 자주 언급하고, 마치 조 존스가 된 것처럼 행동한다. 플레처는 학생들에게 잔인하고 가혹해 보일지라도, 철저하고 완벽한 음악적 이상을 추구해야만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라는 말이 떠올랐다. 변화와 혁신은 새로운 틀과 태도를 필요로 한다. 플레처는 학생들이 소중하게 가꿔온 작고 귀여운 세계를 부숴야 더 큰 세계를 바라보게 되고 성장과 성취를 갈망하게 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건 다정하고 관대하게 보듬어주는 교육으로는 절대 달성할 수 없다고 강하게 믿고 있었다.
정말 플레처의 교육은 학생들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게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을까? 최고의 밴드 지휘자이자 교육자라는 자신의 목표를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더넬런 경연을 앞두고 새로운 곡인 '카라반'의 악보를 나눠주며 플레처는 라이언 코넬리를 스튜디오 밴드로 영입한다. '실력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기회를 준다'라고 말하며, 앤드루의 메인 드러머 자리를 인질로 삼고 또다시 휘두르려 하고 있었다. 경쟁을 통해 동등한 기회를 얻으라는 말은 허울 좋은 명분일 뿐이다. 플레처는 그저 모든 학생들을 자신의 손아귀에 두고 완벽하게 통제하고 싶은 사람이다. 자신의 음악 세계를 실현할 완벽한 밴드. 학생들은 그걸 위한 부품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아 보였다. 음정을 맞추지 못하고 템포를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들은 가차 없이 쫓아내며 끝없이 스트레스를 가하는 플레처의 태도는 교육자로서의 면모가 아닌, 최고의 밴드 지휘자로서 자신의 권위를 지키고 싶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 플레처에게 앤드루는 탐탁지 않은 부품이었다. 잠시 메인 드러머로 앉혀 놨지만, 경연날 선임 드러머의 악보를 잃어버렸던 앤드루였다. 악의를 갖고 메인 드러머 자리를 얻기 위해 악보를 일부러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의구심을 털고 자신의 완벽한 밴드에 걸맞은 메인 드러머인지 더욱 철저하게 검증하고자 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문제의 더넬런 경연 날, 버스의 타이어가 터져버리는 바람에 늦은 앤드루는 억울했다. 렌터카를 빌려 우여곡절 끝에 경연장에 도착했건만 돌아오는 건 자신이 따낸 자리를 코널리가 차지했다는 말이었다. 앤드루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 주는 스튜디오 밴드의 메인 드러머 자리를 내줄 순 없었다. 물러설 수 없던 앤드루는 플레처에게 언성을 높여 자신의 존재를 지키고자 했다. 플레처는 자신에게 맞서는 앤드루를 더 강하게 몰아붙였다. 시키는 대로 자신이 원하는 템포에 맞춰 드럼이나 치면 될 녀석이 감히 자신에게 언성을 높이고 저항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밴드의 부품이 아닌, 하나의 연주자로 자신 앞에 서려는 앤드루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표현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플레처는 기회를 준다. 스틱을 시간 내에 가져오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피투성이가 된 채 드럼 앞에 앉은 앤드루를 말리지 않고 연주할 수 있게 두었다. 플레처는 앤드루의 간절함과 강렬한 집착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앤드루의 모습에서 조 존스의 날린 심벌즈에도 굴하지 않고 재능을 만개했던 찰리 파커를 기대하진 않았을까. 자신을 조 존스로 생각하며 늘 찰리 파커를 기다려왔던 플레처였기 때문에.
플레처와 앤드루, 두 세계가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이야기가 길어져, 남은 이야기는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위플래쉬」를 보고 (2/2)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