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으면 말고요

말할 권리, 들을 권리

by 나의 바다

"전화할까요?"


나는 바로 "좋아요"라고 답하지 못했다.


"천장이 높아서 전화가 울릴 수도 있어요"

그 말 속에는 혹시 피곤하지는 않을까, 혹시 지금 여유가 없는 건 아닐까.

지금 내 말 한 마디가 그를 불편하게 만들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되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싫으면 말고요.”


그 순간, 내 배려는 의심이 되었고, 나의 조심스러움은 무례가 되었으며,

내 말투는 관계를 망치는 태도로 해석되었다.

그 말은 감정의 문을 닫는 말이었다.


그는 내가 전하려던 말의 맥락을 읽기보다 즉각적인 확답을 요구했고,

내 조심스러움은 그에게는 귀찮음, 애매함,

그리고 나아가 거절로 느껴졌던 것 같다.


이 관계 안에서 '말의 해석권'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나는 상하관계에 응답한 게 아니었다.

나는 통화 여부를 결정하는 상사가 아니었고,

그도 지시를 기다리는 부하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감정을 주고받는 수평적인 관계,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은 달랐다.

왜 자기만 전화를 하자고 해야 하는지,

전화가 되면 되는 거지, 왜 그걸 되묻는지,

그 말 안에는 그가 이미 이 관계에서 책임과 행동의 분배를 역할처럼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들어 있었다.

내가 한 되물음은 상대의 컨디션과 기분을 살피는 그저 나의 언어적 습관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나만 또 제안했다’는 피로감과 ‘애매하게 군다’는 해석을 꺼내들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전화가 가능한지 아닌지가 아니라,


내가 "좋아요"라고 즉각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확답이 없는 반응’ = ‘자신에 대한 미지근한 태도’로 받아들였고,

그 순간부터 관계의 온도는 불쾌하게 식어갔다.

그날, 관계는 수평이 아니었다. "왜 나만 해야 하냐"는 말은,

그가 관계 안에서 주도권과 기여도를 수치화하고 있었다는 고백이었다.


나는 그저, 대화의 속도와 감정의 여유를 살핀 것이었는데.

그는 내 반응을 자신의 제안에 대한 무력한 대응처럼 느꼈던 것 같다.

그는 대화에서의 주도성을 관계의 안정성으로 해석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중요한 건 그의 제안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보다,

그가 피곤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누는 대화의 온도였다.


관계 안에서 배려는 종종 '비효율'로 간주된다.

하지만 인간 관계는 언제나 단순하지 않다.

말이라는 건, 의미보다 분위기로 전해지는 것이 더 많다.

우리는 그래서 말의 순서, 속도, 여운, 말투 같은 걸로 서로를 배려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와의 관계 속에서

나의 감정은 언제나 '그의 기준'에 들어맞을 때만 인정받을 수 있었다.


나는 말했고,

그는 평가했다.


나는 묻고,

그는 정리했다.


그와 나눈 대화는 교류가 아니었고, 기준의 통보와 감정의 승인 구조가 되어 있었다.


나는 조심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기분을 읽으려 했고, 말을 한 번 더 생각하고 꺼냈다.

그에게는 그게 비효율적 대화 방식이었기 때문에, 그런 나의 말들을 피로해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러워졌고 하나씩 나를 접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그날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단 하나였다.

"네 괜찮아요."

단 한 문장이면 됐다.

내 말이 애매함도, 회피도, 무례도 아닌, 관계의 방식 중 하나였다는 걸


그가 이해해줬더라면 우리는 아마, 아주 다른 결말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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