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의 메커니즘

판단으로 채워진 관계의 끝

by 나의 바다

이번 상담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가 했던 말들을, 문장 그대로 상담 선생님께 꺼내놓았다.

“선생님, 사실 저한테 하는 말들이 대부분 이상했어요.

‘여럿과 연애하는 건가 싶은 기분이었다.‘

‘감정적으로 대하는 게 반복되었고, 그게 헤어짐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다.’

저는 이미 그 말들이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그때 제가 말했더라면, 저는 또 감정적으로 군 사람이 되었을 테니까요... “


그는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듣지 않았다.


마치 겸손한 의견처럼 들릴 수 있지만, 내가 했던 모든 말은 그의 시선 안에서 언제나 주관적으로 축소되었고, 그의 말만이 객관적 기준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어떤 감정을 말해도 내용을 듣기보다, 그 감정이 생긴 방식과 표현 방식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는 설명할 자격을 박탈당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가 했던 말 중 가장 깊이 박힌 건


“여럿과 연애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항상 애써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 주변인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그걸 두고 그는 마치 내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소비한 듯 말하며 스스로를 모욕당한 피해자로 설정했다.


감정을 표현하는 나를 ‘반복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그 표현을 관계를 망가뜨리는 요소로 몰았다.


그래서 계속해서 나는 스스로가 감정을 느끼는 방식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닐까 하는 혼란에 빠졌다.


그는 여전히 판단을 끝낸 사람의 말투로 나를 마주했다. 감정을 평가하고 관계를 단정 지으며 정서적 피드백의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고 있었다.


나의 모든 표현들이 그의 언어 안에서는 과잉, 오해, 불편함이라는 이름으로만 설명되었다.


선생님은 가만히 들으시고는

“바다 씨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아직 분별을 할 수 있는 상태라는 뜻이에요. 아직 정서적으로는 건강한 상태인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


“그건 가스라이팅의 일종일 수 있어요. 상대가 직접 공격하지 않아도, 상대의 감정을 죄책감과 혼란으로 몰아가며, 결국에는 자신조차 믿지 못하게 만드는 거죠. “


“바다 씨, 그 말들은 단순한 이별의 이유가 아니에요.

오히려 감정의 책임을 전부 바다님 쪽에만 떠넘기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말일 수 있어요.”


내가 침묵하자 선생님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자신의 불편함이나 감정을 정당한 기준처럼 포장해서, 상대방의 감정을 ‘과잉’, ‘문제’, ‘이상함’으로 몰아가는 것도 가스라이팅 시도일 수 있어요.

그 사람은 바다님의 감정 표현을 반복적으로 ‘감정적으로 군다라고 규정했죠. 그 말의 핵심은 ‘너의 감정은 지나치다’, ‘네가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틀렸다’는 메시지예요. 결국엔 바다 씨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어요. ’ 내가 너무 예민했나?’, ‘내가 표현을 너무 많이 했나?’ 하고요. 이해가 되셨나요?”


“결국 바다님은 ‘난 그냥 평범하게 말한 것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말하지?’ 하고 스스로의 판단을 흔들리게 만들었을 거예요.”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 나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무언가 오래 묵은 채무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


상담이 끝나갈 무렵, 나는 선생님께 물었다.


“전에 검사에서 저도 통제와 회피성향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혹시 제가 그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게, 저의 회피였던 걸까요?”


선생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회피가 아니라, 이미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을 아는 사람의 침묵이었어요. 첫 상담 때도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침묵이 꼭 필요할 때도 있답니다. “


나는 상담실 문을 나서기 전, 잠깐 멈춰 섰다.

책상 위에 덜 마신 차가 식어 있었고,

방금 나눈 말들이 여전히 공기 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말이 통하지 않을 걸 아는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는 그 한 문장.

그건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버텨온 모든 시간에 대한 설명이기도 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게 아니라,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는 것.


그리고 문을 나서려는 나를 향해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물으셨다.


“바다 씨, 감정일기 계속 쓰고 계시죠?”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쩌다 보니, 자꾸 쓰게 되더라고요.”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 말이 되어 나오는 데엔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그 시간을 조금은 믿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주일 동안, 건강하세요. 다음 주에 더 나아진 모습으로 봬요!”


퇴근이다 퇴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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