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감을 인정하고 떠나는 이에게 축복을
축시(祝詩) - 류근
내가 당신을 귀하게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지길 바랍니다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밝혀 사랑한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깊은 사랑의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지나간 날들이 당신에게 슬픔의 기록으로 남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고통과 자기 연민의 도구로 쓰여지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아무런 기억도 추억도 아니길 바랍니다
어떤 계절에 내린 비,
어떤 가을날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쯤의 일로
고요하게 지나간 날들이길 바랍니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겠습니다
내 기도가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은 당신의 기도로
나는 나의 기도로
서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살아서 다시는 서로의 빈자리를 확인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서로의 부재가 위안이 되는 삶이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의 손을 놓아준 힘만큼
당신도 누군가의 손을 가장 큰 힘으로 잡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노래는 이제 끝났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축(祝)’이라는 한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빌다(祝), 축문(祝文), 그리고 ’끊는다‘
그제야 이 시가 왜 그렇게도 마음을 흔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히 누군가의 행복을 빌어주는 기도문이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해 마지막으로 쓰는 축문(祝文)이자,
관계를 조용히 끊어내는 작별의 문장이다.
기도와 단절.
그 모순처럼 보이는 두 감정이 한 편의 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작품이 지닌 정서의 결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다.
나는 조용히 울었다.
쌓여 있던 감정의 바위가 무너져내리는,
낙석 같은 울음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를 위해 기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이 왜 그렇게도 눈물겨웠을까.
그의 행복을 빌어주는 일은 더 이상 나에게 위로가 아니었다.
그의 무사함을 바라는 일도 이제는 내 몫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살아내야 할 내 하루를 위해 기도해야 했다.
그를 위해 기도하던 마음이
어쩌면 나를 위한 도피였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기도를 멈출 수 있었다.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사랑했고,
또 이렇게까지 놓아주려 애쓴 내가,
처연하면서도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이 시를 그에게 보내주고 싶은 순간이 올까.
그가 읽는다고 해도, 내 마음을 알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 시는, 언젠가의 나에게는 꼭 보여주고 싶다.
사랑을 감정이 아닌 언어로 내려놓는 방식도 있음을,
그를 위해 기도하지 않아도
내가 충분히 따뜻한 사람이었다는 걸, 잊지 않기 위해.
이제 내 기도는 오직 나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번 다섯 번째 상담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가게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