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는 안녕이 어디 있겠어

품위 있는 안녕을 위한 혼신의 연기

by 나의 바다

상담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메아리처럼 퍼졌다.

나는 자리에 조용히 멈춰 섰다. 다녀온 곳은 마음의 심연이었고, 돌아온 자리는 이별의 표면이었다.


생각보다 또렷하게 남아 있는 말들이 있다.

“헤어짐을 결심한 이유는 감정적으로 대해지는 상황이 반복되었고, 그게 가장 커요.”

그 말 앞에서 나는 끝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닿지 않을 말이었고, 닿을 거라는 기대도 없었다.

이미 당신은 나를 판단했기 때문에 바꿀 수도 없었고, 바꾸고 싶은 마음도 더 이상 들지 않았다.


나는 그를 좋아했다. 좋아한다는 말이 낡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서 감지한 건 애정이 아니라 압박이었고, 내 걱정은 감시로, 내 말들은 오해로 번역되어 버렸다.


나는 그의 감정 없는 문장들을 붙잡고 한참을 해석해야 했다.


“걱정은 내려놓으시고, 행복한 사람이 되셨으면 해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내 이름은 부르지 않았고, 감정의 주어도 사라져 있었다.

무엇이 미안했고, 무엇이 고마웠는지는 말하지 않은 채 떠나버려, 나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결국 모든 시간은 그 말 하나로 정리되었고,

우리가 나누었던 예쁜 감정들은 뿌옇게 흐려졌다.


“그 말이 상처가 되었다면 미안해요.”

그 문장은 미안함을 담기보다, 내 상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장치처럼 느껴졌다.

그가 한 말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받아들인 탓으로 정리되길 바라는 문장.


이별은 때때로 감정 없는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그 문장은 논리로 포장되지만, 정작 마음은 배제된다.

그래서 차분하다는 이유만으로 성숙하다고 믿게 된다.


그는 나를 응원한다고 했고, 행복하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 말은 한때 함께했던 사람에게 전하는 위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방어하기 위한 인사였을 것이다.


‘응원’이라는 단어는, 이상할 정도로 안녕을 정당화할 때 자주 사용된다.

마지막 응원이 따뜻하게 와닿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모든 감정의 무게를 혼자 떠안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토록 길고 조심스러웠던 말들이 남긴 건, 조용한 분노와 허무였다.

이별은 슬퍼야 하는데, 나는 허탈했고, 어쩐지 모욕감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의 응원을 조용히 받아 들었다.


“저는 이제 가장 가까운 팬이자 연인이 아니라, 제가 사랑했던 사람의 하루를 응원하는 사람으로 있을게요.”

나는 내가 건넨 이 다정한 문장 안에 얼마나 많은 체념과 애씀이 들어 있었는지 안다.

당신을 탓하지 않기 위해, 품위 있게 보내기 위해, 무너지는 마음을 꼭 붙잡고 내 언어를 정돈했다.


그날의 이별은 내 감정을 지우는 대신 내가 끝까지 ‘괜찮은 사람’으로 남기 위한 감정 노동의 끝이었다. 그렇게 쓰인 말들이었다.


나는 후회 없는 안녕을 선택한 게 아니다.

후회를 감당하기 위해 애써 품위 있는 안녕을 연기했던 것이다.


후회 없는 안녕이란 게 정말 있을까.

후회가 없는 척이라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안녕이겠지.


나는 후회와 안녕 사이 어딘가에서 여전히 그 사람의 마지막 말을 또 하염없이 곱씹는다.

이건 나 혼자 쓰는 마지막 응답일지도 모른다.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감정일기를 진짜로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고 맞은 한강의 바람은 조금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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