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불안까지 끌어안지 마세요

나랑 나는 알아가는 사이

by 나의 바다

문득 시계를 보니 상담 시간의 절반이 지나 있었다.


오늘은 유난히 내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의 말들 앞에서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더 들여다보고 싶었다.


“선생님,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는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근데요, 첫 상담에도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왜 자꾸 자책을 하게 되는 걸까요?”


“검사 결과를 보면 바다 씨는 성숙도가 높아요. 그래서 내 감정은 뒤로 미루고 타인의 상처부터 감당하려는 습관이 있죠.

그렇게 오래 살아왔고, 그게 생존 방식이었던 거예요. 스스로를 과하게 돌아보는 성향, 모든 잘못을 내 몫으로 끌어안는 방식이죠.”


그 말 안에 내 마음의 복잡함이 다 들어 있었다.


타인이 불편해 보이면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아닐까 싶었고,

상대가 말이 없으면 내가 더 조심했어야 했나 되짚었다.

누군가 도망치면 내가 너무 가까이 간 건 아니었을까 괜히 미안해졌다.


타인의 감정은 늘 그 사람의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언제나 내가 해결하고 감당해야 할 무언가처럼 여겼다


선생님은 그걸 ‘타인의 불안을 대신 끌어안는 사람의 반응’이라고 말했다.

“바다 씨의 그런 마음은 성숙한 마음과 책임감에서 비롯됐을 수는 있지만, 모든 일이 꼭 바다 씨 책임일 필요는 없어요. “


나는 나와 멀어지려는 타인의 말 앞에서도, 심지어는 그 말이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라는 단어를 끝까지 붙드는 버릇이 있었다.


선생님이 감정 카드 묶음을 내밀며 말했다.


“바다 씨는 아직 본인의 감정을 명확히 말로 표현하는 연습이 필요해요.

감정이 느껴지면, 명확하게 어떤 단어로 말해보세요. ‘날아갈 것 같다’.,‘불안하다’, ‘아리다’, ‘설렌다’, ‘허탈하다’, ‘억울하다’… 그런 말들부터요. 긍정 감정이든 부정 감정이든 전부 다요. 지금 드는 감정을 이 카드에서 한 번 찾아볼래요?”


나는 카드 묶음을 조용히 받아 들었다. 그리고 지금 드는 감정에 해당하는 카드들을 내 앞에 놓아두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나는 ‘좋다’, ‘싫다’는 말 위주로 복잡한 감정들을 단순화시켰고, 대부분을 마음속으로 삭이며 표현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타인의 불안을 먼저 끌어안지 마세요. 그리고 지금도 아주 잘하고 있어요.”


무심한 말투였지만,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상담이 끝나갈 무렵, 선생님께서 작은 숙제를 내주셨다.

“감정 일기를 써보세요. 다음 상담까지,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어떤 감정인지 단어로 표현하는 연습을 해보세요.”


다음 상담은 일주일 뒤다.

나는 지금 진짜 나를 다시 알아가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