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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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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wnscale Aug 25. 2019

귀가 못나서 다행이다

     날이 덥고 습한 밤이었다. 숨을 쉬면 공기반 습기반이 가슴으로 썰물처럼 밀려 들어오는 밤이었다. 더울 땐 팥빙수지! 뭘 먹기엔 늦은 밤이지만, 잠에 들기엔 이른 밤이라 애매했다. 팥빙수를 먹지 않으면 꿈에서 팥빙수에 쫓기는 악몽을 꿀 것 같아 슬리퍼를 신고 파리바게뜨로 갔다. 도착하자마자 "팥빙수 되나요?" 직원에게 물으니 약간 머뭇거리다 팥빙수가 된다 한다. 저 약간의 침묵 사이에서 직원이 겪은 갈등이 해피엔딩으로 끝난 것에 감사했다. "스푼은 몇 개 드릴까요"라는 질문에 왠지 혼자 자취하는 사람이라는 게 흠처럼 보일까싶어 스푼 두 개를 달라했다. 포장한 팥빙수를 손에 들고 조금 걷다보니 갑자기 비가 내렸다. 


     쏴아아-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듣노라면 어느새 생각이 그치고 빗소리에 몰입하게 된다. 잠이 오지 않는 사람들의 몇몇은 빗소리를 틀어놓고 잠을 잔다고 한다. 비가 내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비를 피하기 위해 잠시 고가도로 밑에서 빗소리를 듣다보니 어느새 손에 든 팥빙수를 잊고 오롯이 쏴아아-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마음을 뺏는 규칙적인 소리다. 그러다 문득 '규칙적'이라는 말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 수많은 빗방울들이 내는 소리가 '규칙적'이라 내 마음에 평온을 준다 하니 후덥지근한 밤의 빗방울이 겨울 것처럼 느껴졌다.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빗방울이 만드는 소리가 정말 규칙적으로 어떤 하나의 소리를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내가 그렇게 밖에 듣지 못해 규칙적이라 생각하는걸까?


     수만 수억개의 빗방울들은 비슷하게 생겼을지 몰라도 모두 같은 모습으로 생겼을리는 없다. 먼 거리를 달려 내려온 빗방울이 어딘가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비슷할지 몰라도 모두 같은 소리로 부서질리는 없다. 누군가의 우산위에서 부서지고, 어느 잎사귀에 부서지고, 아스팔트 위에서 부서지는 빗방울은 모두 다른 빗방울이고 모두 다른 소리다. 다만 듣는 내 귀가 그 수많은 소리를 구분하여 들을 수 없어 내가 들을 수 있는만큼만 듣고, 내가 들을 수 있는 것들만 들어 규칙적인 소리라 생각하는 것일 터다. 


     내가 들을 수 있을만큼만 듣는다는 것은 내 마음에 도움이 된다. 여러 소리에 밤 잠을 설치며 지치기보다 못난 고막을 변명으로 여러 소리를 비슷한 소리로, 규칙적인 소리로 여기고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 좋긴 하다. 그런데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내는 소리와 표정과 몸짓들을 스스로의 부족함 때문에 내가 들을 수 있는만큼만 듣고, 내가 볼 수 있는만큼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매번 인사를 건네는 누군가의 얼굴에 숨은 그늘을 보고도 별 다른 점을 찾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것은 아닐까. "안녕하세요"라는 평소 같은 인사에 묻은 슬픔을 못난 귀가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것은 아닐까. 평소같지 않은 것들을 평소처럼이라 생각하고, 규칙적이지 않은 것을 규칙적이라 생각하는 둔감함이 무언가를 놓치게 하는 것이 아닐까.


     무지개는 일곱빛깔이라 단순하게 말하지만 결코 일곱가지 색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고, 음계는 7음계라 하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볼 수 있을만큼만 보고, 들을 수 있을만큼만 듣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자 생각해본다. 의기소침하게 하루를 보내자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 보고, 잘 듣자 다짐하는 혼잣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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