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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니스프리 Oct 29. 2019

모래알 같은 행복이 빌딩같은 행복보다 크다

     뇌과학자가 말하길 행복은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빈도가 중요하다고 한다. 우리가 얼마나 큰 행복을 느끼는가보다, 얼마나 자주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가가 우리의 삶에 더 중요하다고 한다. 여의도 빌딩처럼 거대한 행복 하나 보다 모래알 같은 수 많은 행복의 합이 더 크다고 한다. 그 모든 모래알을 모아봤자 작은 벽돌 하나 밖에 안되는 양이라 해도 말이다.


     출근길이었다. 내 앞에서 에스컬레이터를 바삐 내려가는 아저씨가 등에 맨 백팩을 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분이지만 푸짐한 실루엣이 어디에서나 친숙하게 볼 수 있을법한, 그린 듯한 부장님의 뒷모습이었다. 그런 부장님의 백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핑크빛 무엇인가가 위 아래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부장님의 투박한 백팩 옆구리에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 보온병은 당혹스러움에 멀미를 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내가 왜 여기에 매달려 있나. 나는 출근안해도 되는데 어쩌다 이 인간의 등에 매달려 저 지옥철에 올라타야 하나.


     부장님이 핑크빛 보온병이 좋아 본인의 손으로 골랐을리는 없을 것이다. 저 깜찍한 핑크빛 보온병이 취향이셨다면 백팩이고, 운동화고 모두 핑크색이었을 게다. 그러나 오래 신은 페니로퍼는 주름이 자글자글 가 있었고, 실용적인 기능에만 온 신경을 쓴 것 같은 백팩은 잔뜩 부풀은 풍선 같았다. 뭔가 엉뚱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쓸데 없는 상상을 하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출근하는 아빠에게 회사에서 따뜻한 물 드시라고 핑크 보온병을 챙겨 주는 딸이 있겠거니 하는 상상, 당신은 감기를 달고 사니 유자차를 담았다며 보온병을 챙겨주는 아내가 있겠거니 하는 상상, 혹은 회사에서 보온병이 필요해서 몰래 딸이 아끼는 보온병을 들고 나왔을 수도 있겠거니 하는 상상. 어떤 상상이든 터무니 없긴 하지만 출근하는 중이라는 걸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좋은 상상이었다.


     핑크색 보온병을 백팩에 대롱대롱 매달고 다니는 모르는 아저씨의 뒷모습에서 이런 저런 상상을 하는 것이 참 쓸모 없는 일 같기도 하다. 그래도 출근길에 조금이나마 미소를 짓게 해주는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다. 의미 있는 일만 하려 너무 애쓰지 말고, 쓸모 없는 사소한 일이지만 행복한 것들을 주워 담아야 겠다 생각 해본다.


     나는 건물주가 아니니 빌딩같이 큰 행복은 이번생은 어려울 것 같다. 그러니 어디 조용한 바닷가에 가서 둥근 돌이나 주워 담는 것으로도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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