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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wnscale Dec 01. 2019

잘 알지도 못하는 와인을 샀다

     술을 잘 못 마신다. 소주는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뱉고 싶다. "소주"라는 라벨을 붙인 행주 빤 물을 뭐가 좋다고 마시나 싶다. 마시자마자 역한 느낌이 온몸을 훑고 내려가는 기분이 고문 같다. 소주를 맛있다며 벌컥벌컥 마시는 친한 친구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고등학교 과학실험실에 있는 알코올램프를 몰래 술잔에 섞어 보고 싶다. 그래도 맛있다는 말이 나오나. 


     아무리 술이 맛없다지만 항상 안 마시거나, 항상 소주 한 잔만 할 수는 없다. 가까운 사람의 행복 때문에 열린 술자리에서는 내 몫의 술잔을 말없이 바라보며 '그래 실컷 따라라 내가 마시나 봐라'라 한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의 불행에 비롯된 술 자리에선 술잔을 말없이 바라보며 주는 대로 마신다. 불행은 대게 누군가의, 무언가의 거절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거듭 되는 거절을 다시 겪게 하는 건 서로에게 슬픔인 것 같아 마신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만 난 웃는 얼굴에 같이 웃으며 침을 뱉을 순 있어도, 우는 얼굴에 침 뱉는 건 못한다. 다음날 회사 연차를 쓰고 변기를 잡고 토를 하고 말겠다. 


     술이 맛없어 안 마시는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 몸이 그렇게 태어났다. 술이 몸에 들어가면 몸은 술을 '독'으로 여기고 해독을 시작한다고 한다. 해독을 해주는 몸의 세포들이 있는데 그 세포들이 건강한 사람들은 술을 잘 마시는 것이고, 그 세포들이 매우 심약하거나 없다 싶은 사람들은 얼굴이 금세 빨개지고, 소주 한 모금에도 두통이 오고, 다음날 일어나기가 힘든 것이다. 난 그런 사람이다. 술이 주는 알딸딸함이 싫은 것도 아니고, 술자리에서 서로 나누는 이야기가 싫은 것도 아니다. 술 한잔 마실 돈이 없는 가난을 업고 있어서도 아니다. 몸이 그렇게 태어나 서고, 극복하기 힘들어서다. 일반 사람들이 마시는 소주 한 잔이 나에게는 소주 한 병처럼 느껴진다. 어떤 사람은 의지의 문제라고 참고 마셔보라 하는데 그럼 나는 소주 한 잔으로, 당신은 소주 한 병으로 건배를 하면 공평하다 대꾸하고 싶다.


     연말의 술자리에서,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어쩌다 함께 앉은 술자리에서 구구절절 이런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거절하는 것은 고역이다. 하물며 고등학교 때 친구들에게 이런 사정을 말하다가 말하는 나도 짜증이 난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 앞에 있는 술잔을 의연히 외면하지만 그래도 모두가 술을 마시는 술자리에서 술을 잘 안 마시면 무언가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 내가 와인을 샀다. 술을 아예 못 마시는 것은 아니어서 집에서 작은 캔 맥주를 몇 번 홀로 홀짝인 적이 있다. 특별한 날이라 맥주를 사는 것은 아니고, 그냥 그럴 기분인 날에 산다. 그 맥주도 다 못 마시고 1/3은 남긴다. 2/3만 마셔도 알딸딸해서 잠이 든다. 몇 번 맥주를 마시다 보니, 갑자기 와인이 마시고 싶어 졌다. 와인이라 하면 뭔가 있어 보이는 술인데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즐길 수 있는 거리를 하나 더 늘리는 것은 무엇이든 좋기 때문에 한 번 마셔보고 싶어 졌다. 


     가까운 대형마트를 가서 사치를 부려 보겠다고 소고기 코너에서 한 덩이를 장바구니에 담는다. 그다음 와인코너로 가 와인을 훑어본다. 훑어봐도 아는 게 없다. 그래도 소비뇽이라는 단어는 들어봤다. 소비뇽. 소비뇽으로 살까 싶다가도 너무 싼 가격에 흠칫한다. 싼 와인을 마시면 아마 맛없을 거란 근거 없는 생각으로 적당한 가격대를 고른다. 쌓여 있는 와인 중에 상위 20% 안쪽에 들 가격으로 적당한 이름과 적당한 디자인의 와인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소고기를 구웠다. 집에서 소고기를 프라이팬에 구워본 적이 별로 없으니 겉이 아주 바삭바삭하게 탔다. 소고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트에서 사 온 와인을 열려고 뚜껑 포장지를 따니 코르크 마개였다. 아, 난 촌놈이구나. 와인 오프너가 없구나. 와인 오프너라는 것을 사러 편의점에 갔는데 다행히 있었다. 사서 집으로 들고 와 포장을 뜯었는데 쓸 줄을 몰라 유튜브를 검색해서 겨우 겨우 와인을 따고 집에 있는 커피 잔에 와인을 따랐다. 몇 모금 마셔보니 소주를 마시고 뒤에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비린 맛이 와인은 묘하게 포도 과일 맛이 약간 감싸주는 것 같아 그나마 괜찮은 것 같았다. 맛있다고 하기에도, 맛없다기에도 하기 묘했다. 제일 맛있는 건 역시 소고기였다. 검게 타도 맛있다.


     와인을 산 지 몇 주가 흘렀다. 그동안 커피 잔 한 컵도 안 마신 것 같다. 오랜만에 와인을 따라 모니터 앞에 앉았다. 여전히 술을 잘 못 마시는데도, 와인도 딱히 맛이 있는 게 아닌데도 스스로 와인을 잔에 따라 홀짝이는 이유를 잘 모르겠으나 조금은 알딸딸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 눕는다. 평소보다 매트리스에 조금 더 몸이 묻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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