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내리막길
집 문을 나서면 내리막길을 따라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을 들이고 있다. 직선으로 쭉 뻗은 길로 땅과 하늘을 모두 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은행을 보면 가슴이 몽글해진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을 잡은 조그만 꼬마 아이는 복숭아뼈까지 쌓인 낙엽을 신이 나서 이리저리 밟고 있다. 할머니는 허리를 굽혀 낙엽을 줍고는 손녀의 머리 주변에 뿌리며 즐겁게 장난을 치신다. 나는 조금 떨어져서 그 광경을 말없이 눈에 담고 카페에 앉아 이렇게 글로 옮긴다. 인스타 스토리를 어제 처음 배웠는데 내가 보는 것과 그때 느낀 감정을 인스타 스토리처럼 내 머리 위에 올려두고 싶다.
#인사동 청계천
어제는 서윤이와 오랜만에 종로를 갔다. 버스가 너무 오래 걸려 청계천 쪽을 쭉 따라 30분을 넘게 걸었다. 어쩌다 들은 Bruno Major의 The most beautiful thing이라는 노래가 너무 좋아 에어팟을 사이좋게 하나씩 나눠 끼곤 걸었다. 청계천엔 좋은 날씨에 비해 사람이 그리 많진 않았다. 사람들은 종로에 있는 포차나 호프나 노상 치킨집에 다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코로나로 위험하지 않을까란 우려의 시선도 있겠지만 지인들과 맥주잔을 부딪히는 사람들의 이마에 잔주름은 하나도 없었다. 소란스러운 곳을 피해 다리 위에서 청계천을 내려다보았는데 그 광경이 보기 좋았다. 저 멀리 우리가 있는 다리 아래에 놓인 청계천을 가르는 다리 위에서 남녀 한쌍이 서로 사진을 찍는 것이 보였다. 그 둘도 사진을 찍으며 즐거웠겠지만 아주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도 한편 따뜻해졌다.
#집 근처 치킨집
우리 집 근처엔 치킨집이 하나 있다. 호식이 치킨이었나? 브랜드가 어디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10평 정도 되는 가게인데 신기한 게 안에 앉을 수 있는 자리가 하나도 없다. 주방만 크게, 아주 크게 있다. 가끔 지나가면 가족단위로 보이는 3, 4명의 사람들이 서로 얘기를 나누며 반죽을 하고, 기름을 튀기고, 치킨을 넣고, 포장을 하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가족사업 같은 느낌이었다. 예전에 농촌에서 흔했다지만 가족단위로 하나의 일을 같이 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봤다. 그러다가 일요일 늦은 밤 그 치킨집을 또 지나가는데 10평 남짓한 가게 주방에서 홀로 반죽을 하고 계시는 분을 보았다. 천장에 달린 조명이 그분의 어깨와 반죽하는 손을 비추는 모습에서 나는 묘한 경건함을 느꼈다.
#야근하는 건물
야근을 하고 귀가하는 길에만 볼 수 있는 게 있다. 야근하는 사무실의 불빛과 그 불빛 속에서 야근하는 누군가의 그림자다. 버스를 타고 삼성역 근처에서 내려서 지하철역까지 걷다 보면 하늘까지 닿아 있는 건물들을 여럿 볼 수 있다. 바둑판처럼 여러 창들이 같은 모습으로 줄을 지어 수 놓여 있다. 거대한 바둑판이 세로로 서 있는 것 같은 광경이다. 바둑판의 몇몇 곳은 까맣게 그을린 것처럼 불이 꺼져 있고, 몇몇 곳은 작은 전구를 달아둔 것처럼 빛나고 있다. 불이 켜진 저 창 안엔 어떤 사람이 남아 야근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어떤 마음으로 야근을 하고 있을지. 퇴근은 어디로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야근을 하고 있을지. 생전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볼 일이 없을 사람에게 동료애 비슷한 것을 느낀다. 새벽 3시, 회사 건물 10층에 홀로 남아 내일 있을 보고를 준비하던 옛날이 생각난다. 그때 켜진 불빛을 바깥의 누군가가 보며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나는 무슨 마음으로 야근을 하고 있었나?
북유럽의 멋진 자연환경을 매거진에서 보고 나중에 가봐야지 생각을 했다. 동시에 회색 빛 콘크리트에 둘러 쌓인 곳에서, 검은 아스팔트 위에서도 결은 다르지만 작은 감동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 주말 오전의 노란 은행나무 길에서, 소중한 사람과 손을 잡고 걷는 순간에서, 밤늦게 홀로 남아 오늘과 내일을 위해 열심히인 누군가의 시간에서 평범하지만 유일한 순간을 본다. 항상 보던 곳, 그리 다를 것 없는 곳에서 마치 처음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먼 곳으로 가지 않아도, 사람이 없는 장엄한 자연 속이 아니어도 가끔씩 주변에서 느끼는 소중함에 마음이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