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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아이 Oct 26. 2023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엉망진창 완벽주의 엄마라서

"나는 네가 싫어요, 싫어요 거리는 게 너~~ 무 싫다."

시어머니가 나에게 결혼하고 몇 달 안 돼서 하신 말이다.


물론 나도 처음부터 싫어요~거리는 밉생이 며느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어머니에게도 시댁 식구들 모두에게도 이쁨 받으면 당연히 좋지. 내가 선택하고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내 남자의 가족들인데.

그런데 결혼을 하고 디즈니월드 보다도 더 유명한 그곳, 시월드에 입성해 보니 과연 거기에는 세간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대로 내가 알지 못했고, 앞으로 알고 싶지도 않고, 나의 상식과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희한한 권력관계가 존재했다.

사실 위의 저 멘트. 시어머니가 새로 들어온 며느리에게 했던 저 문장을 보면 엄청난 힘으로 상대를 억누르고 싶어 하는 의지가 다분히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은 '싫다'는 감정을 얼마든지 표현해도 되지만 상대방은 '싫다'는 감정을 느끼더라도 감히 마음껏 표현하지 말라는 뜻.


제사 때

"친정 엄마 따라 한 번씩 교회 나갔다고? 이제 결혼했으니 그런데 따라 절대 가지 마라."

"왜요?"

"시댁이 독. 실. 한 불교니까."(사실 살아보니 크게 독실하신지는 잘 모르겠던데 어쨌든)

"그건... 싫은데요."

"왜?"(눈이 엄청 휘둥그레지시며)

"종교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런 건 제가 결정할 일이잖아요."

(사실 나 역시 독실한 편은 아니라 1년에 한두 번 크리스마스, 부활절에 가는 정도였지만)

"..............................................................................................................."


명절 때

"오늘도(설 당일) 여기서(당연히 시댁) 자고, 내일 점심 먹고 저녁쯤에나 친정에 가던지 해라."

"어제도 여기서 잤는데요? 오늘은 친정에 가는 날 아닌가요?"

"여기 큰 삼촌네 식구들, 작은 삼촌네 식구들 그때까지 다 있거든."

"명절 연휴 3일인데 숙모님들은 다들 친정 안 가시는 거예요?"

"응. 원래 우리 집은 계속 그랬다."

"저는.. 그렇게는 안될 것 같아요. 그냥 오늘 점심 먹고 바로 친정으로 갈게요. 그래야 저희 집에서도 하루 자고 동생들도 보고 하거든요. 셋째 날에는 다들 이동하는 날이니까 정신없고 일정 맞추기 힘들잖아요."

"....................................................................................................."


아기 백일 때

"아기 백일상 위에 삼신할매한테 올리는 물 한 그릇 떠 놔라. 젖도 잘 나오고 하게."

"저는 삼신할매 안 믿는데요?"

"믿거나 말거나 손해 될 거 없으니 하면 되지."

"어머님이 아이 할머니로서 하시고 싶은 거 믿으시는 데로 다 하시는 건 얼마든지 괜찮은데요, 직접 하시지 저한테 똑같이 하라고 시키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제가 믿지도 않는 미신을 믿는 척 흉내 내는 게 싫어서요."

"....................................................................................................................."


이사 때

"여기 거실에 왜 이렇게 책장만 많이 놔두냐?"

"아, 아이들 키울 때 책도 많이 보여주고 하려고 거실을 서재처럼 만들까 해요."

"그래도 이런 건 방에 놔두면 되지. 남편 집에 들어오면 여기서 쉴 자리도 없겠네."

(이삿짐센터 아저씨들 무거운 책장 들고 멈칫 거리며 대기 중)

"저희 남편이랑 여기에 책장 두기로 이미 이야기 다 하고 결정한 거라서 자꾸 직원분들 헷갈리게 이 쪽에 놔라, 저 쪽에 놔라 안 그러셨으면 하는데요."

"............................................................................................................."


아기 이름 지을 때

"첫째 이름은 딸이니 너네가 짓는 대로 썼다만, 둘째는 아들이면 할아버지가 이름 잘 짓는데 가서 좋은 이름으로 지어 주실 거다."

"저는 아이 이름은 부모가 직접 짓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네가 좋거나 말거나 이건 시키는 대로 했으면 좋겠다."

"..................... 싫어요."

"................................................................................................................"


사실 시어머니는 하늘이 내려주신 임무인 '시'자 노릇 하실 때만 빼고는 인정 많고 생활력도 강한 멋진 여장부이시다. 그리고 자신의 시어머니에게 지독한 시집살이를 한평생 당하며 시월드에서 모진 세월을 홀로 견뎌내신 분으로 나에게 언젠가 이렇게 하소연하기도 하셨다.

"에휴, 내가 바보지. 그때는 왜 시어머니한테 싫다 소리 한마디 못하고 그렇게 당하고 살았을까?"

그런데... 왜 나에게는 '싫다'라고 하지 말라 하실까?

시어머니의 그 세월을 머릿속에 그려보니 같은 여자로서 안타깝고 속상하다. 며느리인 나에게 이렇게 대할 수밖에 없는 억울하고 화난 응어리가 어느 정도 이해도 간다.

하지만 내가 그걸 똑같이 바보같이 싫다는 소리 한마디 못하고 산다면 나 또한 나의 억울하고 화난 마음을 미래의 내 며느리에게 물려주고 싶겠지. 시월드 대대로 고이 전해 내려오는 내적불행은 이 세대에서 끝내고 싶다.


그래서 앞으로도 싫은 건 그냥 '싫어요"라고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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