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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아이 Oct 31. 2023

ADHD 주부로 살아남기

깜박깜박 ADHD엄마라서

내가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인 ADHD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요즘은 쉽게 이것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자가진단 테스트지를 남편과 한번 해보다가 체크리스트 거의 모든 항목에 내가 해당되는 것 같다길래 설마~ 하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정말 경계성 성인 ADHD라고 했다.


그렇게 딱 정식으로 진단을 받고 나니 그전까지 스스로에 대한 뭔가 모호하게 아리송달송 했던 부분이 명확해지며 한마디로 속이 시원했다.

나는 왜 남들이랑 다를까 싶었던 부분들.

그전까지는 그냥 나사가 좀 덜 조여진 부분이 있는가 보다 막연하게 느꼈던 부분들에 대해서. 물론 전부다 ADHD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나의 성격적 특이함(정확히는 결함) 중 많은 부분은 이것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학창 시절 공부를 해야겠다는 의지는 있는데도 지겨운 수업을 억지로 듣고 있으면 가슴이 쿵쿵 미친 듯이 뛰어서 견딜 수 없었는지?

왜 길 찾기 능력이 5살짜리 아이만도 못해서 늘 가는 똑같은 길만 겨우 다니고 심심하면 길을 잃어버리는지?

왜 밤에 종종 잠들기 힘들고, 아침에는 매번 일어나기 너무나 힘들었는지?

왜 내 방은 엄마가 치워주지 않으면 며칠 만에 완전 폭탄 맞은 것처럼 변해버리는지?

보통의 집에서 보통의 환경에서 보통인 형제들 중에서 왜 나만 보통이 아닌 모난 돌처럼 뾰족한 아이였는지?

내가 자랄 때만 해도 ADHD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나처럼 혼자서 딴짓하는 조용한 ADHD아이들은 전혀 치료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냥 여기저기서 잔소리나 많이 들으면서 자랐다.

나도 내가 게으르거나 의지가 없거나 성격이 나쁘거나 내 생각만 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닐까 내심 생각했으니까.

실제로 ADHD증상이 있는 사람은 유아기 때부터 자신에게 따라오는 '부정적인 인식'에 그대로 노출되어 자아상이 부정적으로 만들어지고 또 불안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증상들 때문에 이제까지 '사는데 꽤 불편하다' 싶었다면 주부가 되어 보니 '불편해 미쳐버리겠다' 정도가 되었다.

우선 청소와 정리정돈은 나에게 무척 X10  힘든 일이었다. 그전에는 지저분하고 어질러진 대로 그냥 대충 한 번씩 엄마찬스 써가면서 살았다면 내가 엄마가 되어 아기를 하루종일 케어하는 입장이 되니 오. 마이. 갓.

내 물건 하나 제자리에 놔두지 못하던 내가 수많은 아기용품들에 둘러싸이고, 청소는커녕 내 몸 하나도 씻기 귀찮아하던 내가 하루종일 무궁무진하게 쌓이는 찌꺼기들을 처리해야 하니 매일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이었다. 또 설거지를 할 때마다 지겨워서 심장이 두근두근. 억지로 꾸역꾸역 하고 나면 기분은 급격히 다운.

하루종일 무한 반복되는 분유 타기-우유병 씻기-기저귀 갈기-이유식 만들기-먹이기- 설거지- 청소- 빨래-집 치우기-아기랑 놀아주기-재우기. 해야 하는 일들은 매일 똑같이 변하지도 않고 반복되었다.


뭐 육아하고 살림하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누구나 다 하는 거라는 거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 같은 ADHD인들에게 '지루함‘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레벨의 고통으로 다가온다. (정상인들은 쉿! 함부로 비난하지 말 것!!)

참고로 나는 지겨운 것보다는 화나는 것, 지겨운 것보다는 무서운 것, 지겨운 것보다는 혼나거나 욕먹는 것을 차라리 선택하는 사람이다. 재미가 1도 없이 무한반복되는 노동을 하고 있으면 누군가 내 머릿속에 들어와 망치로 뇌세포를 하나하나 콕! 콕! 찍어버리는 느낌이랄까.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내가 '생존 본능' 하나는 꽤 질기다는 사실. 나는 앞으로 수십 년 간 지지리도 못하지만 무조건 해야만 하는 이 일을 조금씩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보통 정상인 엄마보다 10배 정도는 느리겠지만 나도 나만의 방식을 찾아 ADHD주부로 살아남기로 결심했다.


이미 2명이나 낳았는데 어쩔 거야,

다시 배속에 집어넣을 거야??!!




 

오늘 아침에도 일어났다

눈 딱 뜨고, 와 오늘도 신나는 하루다 야호!

라고 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일어나긴 일어났다.

내 새끼들과 남편에게

토마토 주스 갈아 주고, 누룽지 끓여 아침밥 주고

맘에 드는 옷으로 골라 입히고 치카치카시키고~

어르고 달래고 협박해서라도 빨리하는 게 포인트!

하나는 유치원차 태워 보내고

더 쪼끄만 하나는 데리고 놀이터에 와서

그네를 밀어준다 500번 정도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갈 때 엉덩이도 밀어준다

요것도 500번 정도

매일 이 시간쯤 마주치는 우리 아파트 경비 할아버지 오늘도 수레에 쓰레기랑 분리수거 한가득 싣고 지나가신다

저 할아버지도 나처럼 오늘도 일어나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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