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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투더 폴리틱 Jun 16. 2021

마오쩌둥과 반우파투쟁

새로운 국가의 건설 그리고 사회주의




마오쩌둥과 반우파투쟁


새로운 국가의 건설 그리고 사회주의





1. 새로운 국가건설 앞에 중국이 마주한 딜레마의 지점들





   새로운 국가의 건설이라는 목표를 이루는데, 당시 마오쩌둥의 중국이 직면했던 ‘현대 국가 건설, 사회주의 국가 건설, 시장경제 자본주의 경제 건설’이라는 각 조건들의 긴장 관계를 중심으로, 마오쩌둥 시기에 발생한 ‘대중운동 노선 정책과 반우파투쟁의 함의’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신중국 건국 시기, 중국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적인 정체성을 담지하는 정치체제와 지배 이데올로기를 확립 및 선전하는 업무를 건설 및 추진하는 것이었다. 외세의 침략, 국민당과 공산당의 40년이 넘는 국공내전의 결과, 당시 중국의 대내외적 상황은 정치, 경제, 군사 모든 방면에 있어서 열악한 상황에 놓여져 있었다. 공산당은 신중국 건국 이전에, 거대한 사회주의 국가를 운영할 경험이 전무했으며, 이는 중국의 역사 속 처음 발생한 일로 ‘이전의 참고할 사례’ 없이 새로운 국가를 형성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인구의 70-8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국가경제의 대부분은 농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중국은 도시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루었던 소련과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노선을 참조 및 모방해야만 했다. 따라서 농촌의 농업 종사들과 도시 지역의 사회주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신중국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설립해 나아가, 공산당의 영도력 아래 강력하게 동원될 수 있는 ‘인민’들을 구축해내야 했다.


 또한 당시 ‘신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의 정체성 뿐만 아니라, 현대 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아갈 의무가 존재했다. 따라서, 과거의 전제군주제에서 벗어나, 국민들에 대한 권익을 보호하고 그들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통해 국가의 정당성이 형성되는 공화국의 틀 내에서의 국가적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이는 사회주의 신중국의 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대변하는 ‘선봉대’라는 정체성과 함께, 더 이상 중국은 1인 독재에 의해서 정치권력이 인민권력을 일방적으로 이끌고 가는 고대와 청나라 시대의 전제군주적 정치과정이 아니라, 철저하게 정치권력이 인민권력에 봉사하고, 인민은 정치권력의 프롤레타리아 대변인으로서의 인정이라는 정치권력과 인민권력의 거대한 사회적 합의 아래 움직여야 함을 드러냈다. 따라서, 중국의 공산당은 무엇보다 인민들이 만족할 수 있는 정치와 사회의 안정 그리고 경제발전의 의무를 책임져야 할 세력으로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안정적인 국가운영을 이뤄내야 했다.


 이와 더불어, 시장경제 자본주의와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신중국의 고민은 상단에서 주장한 현대 국가의 건설 과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이라는 변수에 영향을 끼칠 만큼의 중대한 변수로서 신중국의 공산당에게 다가왔다. (3) 시장경제 자본주의와 어떻게 관계를 설정하는가에 따라서, 중국의 공산당 영도력 중심의 사회주의 정치체제, 이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 모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어떻게 자유시장경제체제와 거리를 두며, 사회주의 내부의 역량만으로 강력한 경제발전을 이룰 것인가를 신중국 공산당 정치인들에게 중대한 과제였다. 이 당시 마오쩌둥은, 소련 일변도의 대내외적 정책과 중국 내부의 ‘자력갱생’의 정책을 통해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통해, 사회주의식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2. 반우파투쟁의 함의에 대해: 삼반오반운동,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을 중심으로


 이와 같은 신중국 건국 당시, 중국 공산당이 형성되어있던 불안정한 조건들 속에서, 마오쩌둥 시기의 반우파투쟁과 대중운동 노선에 대한 각각의 사례로서 (1) 삼반오반운동, (2) 반우파투쟁, (3)문화대혁명 사건들을 구분해 탐구할 틀이 형성되게 된다.



(1) 삼반오반운동 (1951-52)


 공산당 주도의 현대 국가의 기반을 만들기 위한, 관료세력 및 자본가들에 대한 반우파투쟁이었다. 이를 통해, 건국 이후 정치사회적 안정화를 위해 신민주주의 단계를 선언해 ‘중공 당원과 비공산계 지도자들의 계급연합을 추구했던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틀을 파기하고, 계급투쟁을 노선을 기반으로 ‘프롤레타리아 중심의 공산당 영도’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곧 신민주주의 단계의 지점은, 신중국이 ‘애국과 민족’을 기반으로 한 현대국가의 건설에 진정하게 초점을 맞춰다기 보다도, 건국 직후의 혼란을 안정화시키고 약탈과 강간을 저지르던 군벌군대 그리고 부패하고 타락했던 국민당군과 반대되게 인민에게 엄격한 규율, 예절, 도움을 배푸는 공산당원들을 통해 인민의 신뢰를 획득하는 시간이 필요했음을 드러낸다. 또한 이 과정에서 대중운동이 이뤄질 수 있는 대중조직화 운동의 전개 그리고 타도 계급 세력에 대한 분류작업이 진행되었다는 사실 또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곧 삼반오반운동을 통해 신중국은 ‘애국과 민족’에 기반한 현대국가건설보다도, ‘계급투쟁과 공산당의 강력한 프롤레타리아 선봉대 구축’을 중심으로하는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강력하게 매진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삼반오반운동은 중국 인민 전체에게 ‘사회주의의 정체성’을 각인 및 확립시키고,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행정 그리고 경제 및 농촌의 기반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파악된다. 삼반운동은, 정부와 기업 그리고 당의 관료들을 겨냥한 것으로, 반부패, 반낭비 그리고 반관료주요의를 기치로했다. 오반운동은 자본가 계급을 겨냥한 것으로, 수뢰, 세금포탈, 국유재산 횡령, 노동 및 자재의 사취, 그리고 국가경제에 관한 정보누출의 혐의로 고용주들을 재판에 넘기거나, 숙청했다. 이 과정에서 건국초기부터의 반혁명분자 숙청, 항미원조운동까지 형성되었던 대중조직들이 삼반오반운동을 계기로, 강력한 조직화를 이루게 되었고, 더 나아가 종공 당원은 1947년 270만명에서 1953년 610만으로 비약적인 증가 폭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반우파투쟁은, 마오쩌둥이 전쟁을 통해 대중들을 급속도로 조직화하는 지점, 그리고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 및 재확인하고, 사회주의 방식의 경제발전 및 대중운동의 동력을 획득하는 방식으로, 반우파투쟁과 사회주의 정치체제의 강화 흐름이 이후,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 기간에도 주직적으로 관찰됨을 발견할 수 있다.



(2) 반우파투쟁 (57-58년)


 과도기 총노선(제1차 5개년 계획, 1963-57)에 대해 비판하는 쌍백운동(백화제방, 백가쟁명; 56년-57년) 이후, 공산당의 영도에 대해 도전하는 지식인과 자본가의 비판이 제기되며, 이들에 대해 마오쩌둥의 공산당 정권이 일으킨 투쟁이었다. 무엇보다 쌍백운동 당시, 마오쩌둥은 삼반오반운동의 전개 그리고 지속적인 프롤레타리아 교육의 확대를 통해, 지식인들이 자신의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획득한 ‘전문가’(전)이면서와 동시에, 공산주의의 혁명에 자신들의 전문성을 투사시킬 수 있는 혁명 동지(홍)라고 생각했다. 초기 부정부패에 대한 폭로, 관료에 대한 억울한 지점에 대한 폭로가 이어지며 마오의 시작에서 공산주의의 건강한 개혁을 가져올 수 있는 지점들이 공유되는 이상적인 공론의 장이라고 인식했지만, 그러나 쌍백운동이 확대되어 전개되던 57년 초로 접어들며 공산당의 영도력을 비판하고, 농촌집체화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 이뤄지게 된다. 이에 대해 마오쩌둥은, 해당 비판들이 삼반오반운동 당시 처리되지 못한 부르주아 혹은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농민과 노동자를 조종해 반공산주의를 획책해 주도하는 반체제의 시도로 규정하고, 반우파 투쟁을 추진하게 된다.


 반우파투쟁은 공산당에 대해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인민의 적’으로서 반우파투쟁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계급투쟁의 원칙 아래에 정풍운동의 재개하며 당관료들의 사익추구 행태를 바로삼고 당관료와 지식인들 사이의 연대관계를 타파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덩샤오핑 역시 정치체제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의 탄압에 앞장섰다는 지점은 인상 깊은 지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산당의 강력한 반우파투쟁의 전개, 본래 중국 공산당 내부에 부족한 지식인들의 양적임과 동시에 절지적인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를 통해 공산당 내부를 장악하는 사람들 대다수는, 노동자나 농민 출신의 새로운 집단으로, 반지성주의와 배외주의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공산당 내부에서 고위직을 얻는데 급급한 사람들로서, 근대화된 지배 엘리트에 대한 적대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중국이 직면한 근대화 문제에 그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능력이라면, 단지 계급투쟁의 연장선 상에서 반우파에 대한 광적인 복수심과 열정만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 계획경제 노선을 확고히 했고, 더욱 과감한 대중운동과 농촌집체화 운동을 ‘제2차 5개년 경제계획인 대약진 투쟁’ (1958~)을 추진하는, 동력을 얻게 되었다. 대약진 운동은 5년 안에 선진국인 영국을 따라잡겠다는 ‘과도기 총노선’보다 더욱 비현실적인 경제적인 발전목표와 발전방식을 토대로 전개되게 된다. 또한 대약진에 대한 마오쩌둥의 근본적인 기획자체가, 치밀한 경제학와 근대화에 대한 논리의 습득이 아니라, 인민 대중의 조직화된 대중심리 그리고 공산당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숭배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결코 체계적인 정책화 과정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 아래 진행되지 않았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이성적인 반우파투쟁의 전개와 대약진의 전개는, 마오쩌둥에게 대외적 정책을 펼치는데 있어서도,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을 수반하는 외교를 실행하게 되는 내부적인 동기가 된다. 대표적인 예시로 중소분쟁의 격화를 이야기할 수 있다. 중소분쟁의 원인으로는 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쵸프의 스탈린에 대한 격하운동 계시가 논해지지만, 궁극적으로 소련이 중국에 대해 등지게 된 계기로는, 중국의 비현실적인 대약진 운동의 전개 그리고 1958년 대만 금문도 포격을 통해 소련이 미국과의 대치를 할 수 있다는 중국의 비현실주의적 판단들이, 소련의 중국에 대한 의문을 확대시켰다. 이는 소련의 중국에 대한 기술적인 지원을 끊게 되는 계기가 되면서, 중국의 감정적인 대외적인 정책들이, 국내 경제발전의 한계를 불러오게되는, 악영향까지 미치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반우파투쟁은 공산당 내부의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의 계급투쟁을 대내외적으로 확산시켰고, 이는 대내외 문제에 대한 전문적이고도 합리적인 접근을 마비시켰다고 볼 수 있다.



(3) 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은 새로운 당-정부를 건설하기 위한 마오쩌둥의 홍위병 중심의 반우파투쟁으로, 문화대혁명이 존재한다. 문화대혁명은, 대약진에 대한 마오쩌둥의 비판이 노산회의(1959)에서 이뤄진 이후, 류샤오치 및 덩샤오핑 정권이 마오쩌둥의 농촌집체화 정책의 오류를 수정하고, 부분적인 자유시장경제화 정책을 펼치게 되는 과정에서, 정권 유지의 위협을 느낀 마오쩌둥이,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중심으로 구성된 속칭 ‘수정주의’ 세력들을 탄압하고, 순수한 공산당 중심의 사회주의 노선 재확립을 위한 반우파투쟁이다. 1964년 정치, 경제, 조직, 이념에 대한 사청운동이 일어나고, 1966년 8월 9일 중공 중앙위에서 <중공 중앙위의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이 발표되며, 본격적인 문화대혁명의 시기가 시작되게 된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무엇보다 4구척결(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관습, 낡은 풍속)과 4대자유(사구의 폐단에 대한 자유로운 이야기를 하라는 것, 4구에 대한 자아비판)이 강조되었다.


 무엇보다 문화대혁명의 반우파투쟁이 지니는 중요한 함의는, 해당 반우파투쟁이 단순한 공산당 영도에 대해 반대하는 지식인들에 대한 탄압에 그친 것이 아니라, 린뱌오 국방부장직을 필두로 하는 인민해방군과 비공식 조직인 홍위병의 가담을 통해서, 중국의 정치구조에 대한 변화를 꾀한 ‘내전’의 성격을 지닌다는 지점에서 중요한 함의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는 공산당 내부 정치세력의 충돌로 인해, 중국 사회 전역이 군을 동원한 충돌로 이어지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마오쩌둥의 군 조직을 동원한 급진적인 계급투쟁의 전개는, 마오쩌둥이 국내 우파들을 감정적이고도 폭력적인 방식으로 탄압하고, 자신의 사회주의적 정책을 추진하는 동력을 획득하려했던 기존의 반우파투쟁들(삼반오반운동 그리고 반우파투쟁)을 통해 이미 예견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위와 같은 반우파 투쟁의 과정들은, 중국의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강력한 정체성 형성에 도움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중국의 근대화 건설과 경제발전을 추진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들로서 전문가 인력들의 파괴를 불러왔고, 급진적인 계급혁명에 기반하는 농민과 노동자 출신의 공산당원들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생산대 간부가 생산대 인원들을 통제하고 생산대대와 인민공사의 관료들에게 허위보고를 하며, 인민을 해방시키기보다는, 해방되어야할 인민을 생성해나아갔다는 존 킹 페어뱅크, 멀 골드만의 아이러한 주장처럼, 마오쩌둥의 반우파투쟁은 급진적인 계급투쟁 노선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공산당의 농민과 노동자 출신의 관료들을 중심으로 경제정책을 추진하게 했으며, 이 과정에서 배태되는 폐단으로의 우파와 개혁파의 집단들은, 또 다시 마오의 급진적인 반우파투쟁과 경제정책을 생성해내며 악순환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공산당 내부에 부족했던 근대화 추진 전문가들은 소멸되었고, 공산당의 대다수의 구성원들은 ‘군인’들로 채워지게 된다. 이로 인해 공산당은 점차 ‘군사조직화’되어 갔고, 근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은 급격하게 약화되어 갔음과 동시에, 프롤레타리아를 대변하는 농민과 노동자도 퇴출되어, 권력투쟁을 위한 정치적 긴장만이 공산당에 남겨졌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반우파투쟁 그리고 문화대혁명 기간이라는 강력한 반우파투쟁의 20년은, 중국의 잃어버린 20년으로 평가받으며, 중국의 내부구성원들이 전문가에서 농민과 노동자들로, 농민과 노동자들에서 군인들로 채워지게 되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는 이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경제적인 근대화의 문법을 이해할 수 없는 공산당 내부 역량의 한계로 드러나며, 적극적인 기술관료 중심의 공산당으로 인사혁신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또한 문혁이 중국사회의 기층부터 엘리트에게 남긴 깊은 상흔은 국가적인 트라우마로서 존재하게 된다. 무엇보다 문화대혁명에서 타파의 대상이 된 ‘우파’에 대한 모호한 규정은, 홍위병을 중심으로한 비합법적이며 야만적인 준군사세력이, 중국의 문화, 사회, 정치 모두를 파괴시키는 양상으로 전개되어, 마오쩌둥이 통제 불가능한 정치사회의 폭력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해당 사건의 심각한 함의가 존재한다. 이를 통해, 중국 사회 속 교육제도로서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의 기능은 마비되었고, 그들을 지도하는 부모, 교사, 사회지도자, 관료들 모두가 타파의 대상이 되어 무분별한 ‘기층체제’의 타파가 이뤄졌다. 이 공산당 외부의 세력뿐만 아니라, 당내의 60%에 달하는 당 간부가 축출될 만큼 극렬한 공산당 내부에서의 이념적인 대립을 불러왔다. 이는 곧 마오쩌둥이 건설한 당과 국가의 붕괴를 의미했으며, 이후 홍위병이 마오쩌둥의 지원세력이었던 군세력마저 타도하려들자, 마오쩌둥은 홍위병들을 노동캠프로 좌천시키며, 문화대혁명의 과열된 열기를 무마하기 시작한다.



3-1. 반우파투쟁과 3가지의 긴장이 같는 함의와 오늘날 중국에 대한 영향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일련의 반우파투쟁의 원인은 무엇이며, 그 함의는 무엇일까? 우선, 마오쩌둥 시기 일련의 반우파 투쟁의 원인으로, 1) 미진한 현대국가 건설로 인한 법치주의의 부재 그리고 2) 건국 초기와 건국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사회주의 체제가 수정주의의 위협아래 놓였다는 지점들을 사고해볼 수 있다. 1) 미진한 현대국가 건설은 전제군주국가의 정치체제 속성이 완벽하게 소멸되지 않은 중국의 정치적 풍토 속에서, 마오쩌둥이 황제로서 1인 독재의 권력을 향유하며, 자의적으로 법을 해석하거나 무시하며 과감한 정치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법의 공백을 낳았다는 지점이다. 이는 곧 신중국 국가의 건설기, 중국은 국가의 권력이 법치주의에 입각해 합법적인 공권력을 활용하고, 이를 통해 국가권력으로부터 인민들을 보호하는데 실패했다는 의미를 드러낸다. 또한 2)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대한 마오쩌둥의 집착과 불안이, 그로 하여금 급진적인 계급투쟁을 통해 우경화되는 중국의 정치풍토를 바로잡고, 더 나아가 중국의 사회주의화의 적임자로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는 지점이다. 중국은 건국 직후부터 소련 일변도 정책을 펼쳤지만 소련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고, 이후 흐루시쵸프의 등장으로 수정주의 노선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수정주의에 대해, 혁명의 목표를 포기하는 것이며, 자본주의의 부활을 용인하는 특별한 신분과 세속적 재물의 축적이라는 해악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정의할 만큼, 수정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터였다. 더 나아가, 지속적으로 중국 내부에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반체제 여론이 조성되고 있었고,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하지 않은 상황 속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의 자유시장 자본주의적 요소를 중국의 경제에 삽입시키는 개혁노선은 중국의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할 가능성을 비추어졌다.



 상술한 바와 같이, 중국의 반우파투쟁은 글의 초반부에서 제시한 중국의 국가건설이 내포하고 있는 3가지의 긴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반우파투쟁의 전개과정과 원인들을 통해, 도출해낼 수 있는 함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중국 공산당의 영도력에 의한 ‘통제’와 통제 이외의 중국 사회와 경제에 대한 자율성과 창의성의 ‘관리’라는 지점의 경계에 대한 논의로서, 반우파투쟁의 정치정치사에서의 함의를 사고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마오쩌둥 시기 반우파투쟁의 흥미로운 함의는, 마오쩌둥이 결코 지방이나 전문가집단에 대한 통제 일변도의 태도를 형성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지방과 전문가집단이 공산당 영도력에 대해 지지한다는 전제하에 그들의 전문성, 자율성 그리고 창의성을 허락하는 ‘관리’의 지점을 견지하고자 했던, 중첩적인 시선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마오의 ‘통제와 관리’의 양분된 관점은, 삼반오반운동, 반우파투쟁 그리고 문화대혁명 시기 모두에서 환기되는 관점으로서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즉, 마오는 자신이 중심이된 공산당의 강력한 영도력이라는 통제가 유지되는 선상에서, 지방, 지식인, 기술관료 및 전문가집단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는 가설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각각의 운동이 촉발된 원인에게 발견될 수 있는데, 삼반오반운동의 경우 결코 국민당에 속했던 관료들의 행정기구와 자본가들의 토지와 자산을 ‘탈취’하지 아니하고서는 공산당이 정치와 경제의 기반과 그에 대한 영도력을 설립할 수 없었던 불가피한 상황, 쌍백운동이 공산당의 건강한 노선투쟁을 넘어서 공산당의 영도에 대한 정당성 자체를 비판하는 상황, 수정주의적 세력이 소련에서부터 확장되고, 중국 만의 특수한 노선을 고수함으로써 공산당 영도력을 확보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중심이된 개혁파 세력들이 소련의 수정주의와 흡사한 정책을 펼치며, 마오쩌둥 자신과 자신의 통제 아래에 있는 공산당의 영도력을 약화시키려고 했던 상황처럼, 자신이 부여한 자신과 공산당 일당 독재에 대한 복종으로 이뤄져야 할 통제와 자신의 통제 아래 자율적인 혁신과 창의성을 도모하는 관리의 경계가 무너진 결과였다는 것이다.



3-2. 마오쩌둥 이후 반우파투쟁은 소멸되었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마오쩌둥이 ‘통제와 관리’의 모호한 경계는, 마오쩌둥 이후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모두에게 미묘하지만, 공산당 영도력의 견지라는 ‘통제’와 공산당의 영도력에 도전하지 않는 준수에서의 자율성과 창의성(혁신)의 발현이라는 ‘관리’의 경계가 분명하게 지속적으로 존재해오고 있다. 예를 들어, 덩샤오핑 역시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치체제에 대한 통제는 본래의 사회주의 노선을 강력하게 유지하며, 자율적인 관료들과 지식인들의 창의성과 혁신의 역량은 처절하게 중국의 경제발전을 추진할 수 있는 경제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했다. 이는 곧 덩샤오핑이 자신의 개혁개병을 중국 정치체제의 자유화와 민주화로 오독한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한 개의 중심과 두 개의 기본점’ (경제건설 중심, 개혁개방 및 4개항 기본원칙(공산당 영도, 사회주의 노선, 프롤레타리아 독재, 맑스-레닌-마오 사상 견지)을 표명함으로서 제도화해야만 했다. 또한 천안문 사태와 같이, 개혁개방의 흐름을 통해 정치체제의 민주화와 자유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세력들에 대해서는, 단호히 공산당의 영도를 위협하는 ‘동란’으로 규정하고, 철저하게 탄압해야 했던 것은, 마오쩌둥이 발생시킨 3번의 거대한 반우파투쟁의 원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중국사회의 경제발전이 가속화됨에 따라 인민들의 생활수준은 높아지고, 사상의 범위로 다원화되어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점차 복잡해지고 다원화되어가는 중국 사회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중국 공산당과 지도자들은, 공산당의 강력한 통제과 민간 영역에 있어서는 자율적이고도 창의적인 관리의 지점을 합치하기 위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공산당 영도에 대한 자유화와 민주화 요구에 대해서는 탄압하지만, 과거보다는 느슨한 수준의 민간 영역의 활기와 자율성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장쩌민의 3개 대표론을 통해 자본가에게 당원 자격을 부여함에 따라 자본가들의 역량을 중국의 역량으로 통합함과 동시에 그들의 독단적인 활동을 통제하는 지점에서도, 또한 시진핑 국가주석이 세계 패권 경쟁을 위해 중국 내 민간기업의 과학기술의 혁신을 장려하지만 마윈과 같은 거대 하이테크 기업가들이 중국 공산당의 통제와 사업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강력하게 규제하는 모습들을 통해서 그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보론: 우파란 누구인가?



 이와 같은 논의를 통해서, 필자는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우파란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조금이나마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판단한다. ‘우파’란 곧 각 시기 별로, 중국 공산당의 통제 혹은 중국 공산당의 영도력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부르주아 지식인, 전문가, 공산당 내부의 급진적 개혁파와 같은 여러 반체제적 인사들이 포섭될 수 있는 범주안에 존재하며, 해당 시기의 정치적 긴장의 성격에 따라 우파로 규정되는 인사들이 변동되어가는 지점들을 관찰할 수 있다. (1) 삼반오반 운동의 시기 우파는 중국 공산당과 정부기관에 포진한 신흥 엘리트 관료집단, 지주, 일부 부농으로 규정되고, (2) 반우파투쟁의 시기 우파는 부르주아 지식인들과 그들에 동조한 농민, 노동자 그리고 관료들로 규정되며, (3) 문혁 시기의 우파는 우경화된 관료집단과 당원들, 4구에 해당하는 교수, 지도자, 지식인, 전통주의자들 등 전사회 범위에 존재하는 기득권 세력들로 느슨하게 규정이 됨을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중국에게 있어 우파의 개념은 단적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 공산당의 영도가 직면한 위기의 속성과 위기를 불러온 주체들에 대한 규정에 따라서 유연한게 규정될 수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중국 공산당의 시각에서보면, 우파가 자신들의 영도력을 견지하고 정치사회적으로 여론을 통제하며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정치적인 도구이지만, 되려 이와 같은 정치적 도구가 ‘문혁 시기’때와 같이 자의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대 및 심화될 수 있기에 중국 국내정치의 근본적으로 위협이 되는 개념임도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의 향후 우파투쟁은, 마오 시기와 같은 대중노선에 입각한 무분별한 정치폭력으로 행사되기 보다는,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강력한 법제 및 법치운동에 입각해, 법에 의거한 반우파투쟁이 실현될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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