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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bk Sep 18. 2023

유럽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

Die Krisis der europaischen ...


 에드먼드 후설은 현대철학의 기초 토대가 되는 현상학의 창시자이다. 본래 수학박사였던 후설은 철학도 자연과학의 방법론이 다르지 않다 주장한 브랜타노의 가르침을 받아 철학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후설은 스승인 브랜타노의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정면으로 대립하는 학문을 창조했으니, 그것이 바로 현상학이다. 현상학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생생한 현상으로, '사태 그 자체'로 돌아가 탐구를 다시 시작하여 엄밀한 하문의 토대를 세워야 한다는 회의론적 방법론이다. 20세기 초반을 장식한 길고 긴 연구를 정리하듯 후설은 1936에 생전의 마지막 저서인 <유럽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을 집필한다.


 후설은 무엇을 유럽학문의 위기라 칭하였을까? 그것은 바로 생활세계의 위기이다. 생활세계(선과학적 경험세계)는 우리가 직접 체험하는 삶의 현장이다. 후설은 이 생활세계가 위협받고 있다 생각했다. 무엇이 생활세계를 위협했을까? 그것은 객관주의의 지나친 성공, 경험실증주의, 혹은 과학의 맹신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겐 낯선 문제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은 현대사회 속에 여전히 산재해 있으며, 이러한 문제들이 낯설게 느껴지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후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후설은 여기서 어떤 '위기를' 언급하고 있는가? 약간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실증 학문, 더 특수하게는 과학의 객관주의 패러다임이 지나치게 성공적 이어왔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위기는 극적 몰락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게 작동하는 무지에서도 드러난다. 후설에 따르면. 실증 과학은 더 이상 상자신의 토대를, 그리고 자신의 최정적 한계를 반성하지 않을 만큼 막대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저 기술적 진보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학문들이 작동하는 바로 그러한 (형이상학적) 틀에 붙어 있는 근본적 문제들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진리란 무엇인가?' '지식이란 무엇인가?' '실재란 무엇인가?' '훌륭하고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문제들이 그러하듯이. 달리 말하자면, 실증 과학들은 존재론적, 인식론적 해명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의 실존론적 타당성을 잃어버렸다. 이러한 이유로 후설은 학문이 철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파산해 버렸다고 고발한다." -후설의 현상학 p.220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된 과학적 방법론은 20세기 초반에는 물론 현대까지 성공적인 효과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과학적 방법론만이 실재(real)를 있는 그대로 기술할 수 있다는 고집으로 이어졌다. 과학적 방법론은 간략하게, 관찰을 통하여 가설을 수립하고 그 가설을 통제된 환경에서 실험을 통하여 경험적으로 입증하는 과정을 말한다. 경험적으로 확실한 결과를 보여주는 듯한 과학에서 후설은 어떤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였을까? 후설의 문제의식을 알기 위해선 칸트의 인식론을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칸트는 인간이 무엇을 인식하여 경험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즉 경험의 조건이 무엇인지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분석하였다. 칸트의 분석에 따르면 인간은 물자체(Ding an sich)를 인식할 수 없으며 인간은 오로지 그것의 표상(vorstellung) 밖에 인식할 수 없다고 한다. 물자체는 관측된 자연이 아니라 관측되기 이전의 자연, 실재(real)이다. 인간은 물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며 오로지 고유한 조건을 통하여 표상만을 인식하여 경험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성은 오로지 개념화를 통하여만 무언가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대한 개념의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인식할 수 없다. 우리에게 나뭇잎의 개념이 부재하다면,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구분하여 인식하지 못하며 그저 나뭇잎을 나뭇가지의 일부로 이해할 것이다. 그러니 개념화하기 이전의 자연 그 자체, 물자체 혹은 실재를 우리는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오로지 개념화하여 인식한 것들의 집합인 표상의 세계이다.


  다시 후설과 함께 과학적 방법론을 바라보자. 과학적 방법론의 경험실증주의는 세계가 항상 본질적인 본연의 상태로 고정되어 있음을 가정하며 이러한 세계를 실험을 통하여 도출되는 경험으로 본질을 밝혀냄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칸트를 통하여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표상이란 것을 밝혔다. 실험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경험은 실재가 아니라 표상이며, 이러한 표상은 유동적인 개념들을 통하여 형성되기 때문에 가변적이다. 후설은 이러한 점을 지적한다. 후설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가 당연하게 그대로 있다는 믿음을 괄호 쳐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모든 학문의 기초를 엄밀하게 다시 고려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후설은 다시 질문한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이것을 알기 위해 후설은 인간이 생생하게 경험하는 주관적 현상, '사태 그 자체로'돌아가야 한다 주장한다.


 브랜타노는 인간의 의식은 항상 지향적임을 밝힌다. 인간의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며 대상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후설도 이러한 브랜타노의 의견을 따른다. 의식의 지향은 주관적이다. 이러한 주관적인 응시를 통하여 우리는 세계를 파악한다. 실험도 이와 같다. 가설이라는 주관을 가지고 통제된 실험을 통하여 그것을 증명한다. 실험의 통제에는 관찰자의 의지가 개입되어 가설검증과 무관한 세계의 정보들이 제거된다. 또한 이렇게 증명된 가설이 지식 혹은 개념이 되어 세계의 일부분이 된다. 그리고 그 세계를 실험을 통하여 검증한다. 인간은 세계를 구성해 나감과 동시에 그것을 밝혀내가는 자이다. 과학적 방법론의 맹신은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망각은 세계를 명증 하게 파악하기 힘들게 하며 우리가 체험하는 생활세계를 위협한다. 과학적 방법론의 맹신이 만드는 고정되고 수치화된 세계는 생활세계의 다원적 속성을 억제시키며 경직시킨다. 이러한 경향이 지속된다면 세계를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은 축소될 것이며, 경직된 인간들은 점차 기계화 혹은 도구화될 것이다. 이것이 후설이 말한 위기이다.


"후설이 결코 실재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틀리고, 부당하고, 불필요하다고 암시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반대로 후설이 비판하고자 했던 전부는 바로 과학의 우쭐대는 자기 이해에 있는 어떤 요소들이다. 한편으로, 후설은 실재가 과학에 의해 정의된다는, 다시 말해 실재는 물리학에 의해 파악되고 기술될 수 있는 것과 동일하며, 따라서 책상, 의자, 책, 국가와 같은 일상적 대상들의 실재에 대한 상식적 믿음은 그저 거대한 환영일 뿐이라는 과학적 가정에 도전하고자 했다. 다른 한편에서 후설은, 과학의 무미건조한 객관주의(실재를 주관성과 해석, 그리고 역사적 공동체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것의 견지에서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했다. 후설은 과학적 이론과 기술의 타당성을 인정하며, 심지어 이것들이 우리의 일상적 관찰보다 더욱더 높은 정도의 객관성을 획득한다는 것조차 시인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후설이 반복해서 지적하듯이, 우리가 이러한 배경에서 1) 오직 과학적 설명만이 참된 실재를 포착할 수 있다거나 2) 과학적 설명들이 아주 철저한 의미에서 우리의 경험적, 개념적 관점에 독립적인 무언가를 어떻게든 붙잡아준다고 결론 내린다면, 우리는 잘못된 추론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과학이 실재에 대한 절대적 기술, 즉 전지적 관점에서의 기술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오해다. 우리는 물리학이 존재하는 것의 유일한 결정권자이며, 진지하게 취해져야 할 모든 개념들이 정밀과학의 어휘와 개념적 장치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가정을 거부해야만 한다." -후설의 현상학 p.224


 후설의 사상을 오로지 주관적 경험만이 있으며 이것을 공유할 수 없다는 회의주의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후설은 어떠한 현상의 본질들이 있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본질들이 학문의 가능성의 근거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후설은 인간이 주관적인 삶의 현장 생활세계를 경험하는 사태 그 자체, 현상을 분석하여 상호주관성 속에서 본질직관을 통해 모든 학문의 기초를 세울 수 있다 생각하였다. 이러한 본질직관은 실험의 반복을 통한 다수의 경험의 통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본질직관은 현상학적 환원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후설이 생각한 현상학적 환원과 상호주관성, 현상학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추후 다른 글에서 작성해 보도록 하겠다.


 후설이 지적한 위기가 현대사회에서 충분하게 해결이 되었을까?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넘쳐나는 정보들과 그것을 판별할 여유와 능력이 없는 현대인들. 이러한 상황은 좋은 팔로워를 생산하는 것에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확실하다 믿어지는 과학적의 증명에 과학의 영역이 아닌 너무 많은 것들을 의탁한 결과로 느껴진다. 후설은 과학의 유용성과 신뢰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너무 많이 기대어 버린 나머지 대화와 타협을 통한 세계를 구성하는 역할을 망각해 버린 것이 아닐까?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지적은 훗날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으로 이어진다. 현대사회 속 과학의 완고함의 밖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깊이 고민해 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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