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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bk Sep 20. 2023

에로티즘

L'Erotisme

  다양한 분야의 글을 남긴 프랑스의 저술가 조르주 바타유. 본래 그는 사제가 되기 위해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였지만, 수학중 아버지가 병을 얻어 생계를 이어나가기 어려워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자퇴를 한다. 이후 국립 고문서학교를 졸업하여 국립도서관 사서로 재직하며 여러 가지 저술 활동을 하였다. 바타유는 헤겔과 마르크스와 같은 주류 철학계의 영향을 받았지만 니체. 프로이트, 베르그송 등 주류 철학계에서 벗어난 이단아들의 영향을 더욱 뚜렷하게 받았으며 그 또한 이단아였다. 바타유의 사상은 후에 라캉, 푸코, 데리다, 보드리야르와 같은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탄생한 훌륭한 작품들 중에 하나인  <에로티즘(1957)>은 그를 대표하는 저서 중 하나이다. 그는 에로티즘을 통해 인류의 역사 속에 스며들어 있는 금기와 그것의 위반에 대한 깊은 고찰을 전해주었다.


"에로티즘 그것은 죽음까지 인정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에로티즘의 정의는 아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다른 어떤 표현보다 에로티즘의 의미를 잘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정확한 정의가 문제라면, 번식 차원의 성행위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에로티즘도 번식의 특수한 한 형태이므로, 번식에 목적을 둔 성행위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성 동물의 공통된 행위이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은 성행위를 에로틱한 행위가 되게 했는데, 단순한 성행위와 임신에 대한 생각이나 번식 등 자연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심리적 추구로서의 에로티즘을 구분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그 점이다. ... 일반적으로 철학의 오류는 생명을 멀리할 때 비롯된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서는 안심해도 좋다. 나의 고찰은 생명과 아주 밀접하게 관계한다. 나의 고찰은 번식 차원의 성행위와 관계한다는 말이다. 나는 에로티즘은 번식과는 대비된다고 말했다. 에로티즘이 목적으로서의 번식이나 에로틱한 유희와는 무관하게 정의되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번식에 대한 기본적 의미 파악은 에로티즘을 푸는 열쇠가 되어줄 것이다." -에로티즘 p.11


 인간의 문화란 동물과의 분기점을 뜻한다. 인류에게 문화의 탄생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 즉 '인간다움'을 규정한 순간이다. 고대 인류에게 인간다움의 첫 번째 규정은 무엇이었을까?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의견에 따르면 그것은 '근친상간의 금지'였다. 바타유의 사유도 이와 멀어 보이지 않는다. 문화의 탄생은 곧 금기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금기의 탄생은 에로티즘의 탄생을 불러왔다.


 에로티즘은 인간의 고유한 내적 체험이다. 내적 체험은 오로지 자신이 느끼고 체험해야 현전 되는 주관적 영역이다. 그러므로 개념적 분석이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바타유는 에로티즘을 바라봄과 동시에 에로티즘의 조건, 즉 에로티즘을 형성하는 외적 조건들을 분석한다. 바타유가 생각한 에로티즘의 외적조건들은 바로 금기와 위반이었다. 금기와 위반의 줄다리기가 에로티즘을 구체화시킨다. 이것은 금기와 위반의 변증법이다. 금기는 금기의 위반을 지양시킴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표출한다. 더욱 강한 금기는 더욱 강한 위반을 불러오며, 다시 더욱 강한 위반을 지양하기 위해 더욱 강한 금기가 확립된다. 그렇다면 고대 인류에게 어떤 금기가 있었는가?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자연을 변화시킴과 동시에 스스로를 표현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동물성(야생성)에서 멀어지며 이성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의 이성은 노동을 위해 도구를 제작하고 타인과 협력하였으며 이것들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문화가 되어갔다. 공동체에 속한 인간에게 노동력은 생산수단이자 자산이었다. 노동으로 생명을 이어나가는 인간에게 죽음은 공포를 느끼게 한다. 이성을 가지게 된 인간에게 죽음은 개인에게도 공동체에게도 멀어지고 싶은 부정한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일상 속에서 격리시켰다. 살인을 금하고, 살인을 부르는 폭력을 지양하며, 시체를 일상과 격리된 장소에 매장하였다. 문화 속 인간에게 죽음은 금기로 자리 잡았다.


 노동을 통한 문화의 탄생에는 죽음과 함께 성이라는 금기 또한 탄생시켰다. 성의 제한 또한 인간을 동물성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번식행위는 남녀가 함께 있어야 이루어지지만 고대 사회에선 여성의 가치를 더욱 신성시했다. 인간은 번식과 출산을 통해서만 후손을 남겨 문화를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의 임신은 노동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기회이자 풍요를 기원하는 신성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가족공동체 내에서 남녀의 성비의 불균형은 공동체의 유지에 큰 문제를 가져왔다. 남성이 많은 공동체는 출산을 위하여 여성이 필요하였으며, 여성이 많은 공동체는 남성이 많은 공동체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힘이 부족했다. 그리고 폭력과 죽음은 두 공동체 모두 피하고 싶은 결과였다. 그래서 신성한 여성을 여성이 많은 공동체가 여성이 적은 공동체에게 보내는 것은 호혜를 통한 평화의 기원과 거래의 의미를 가지게 있었다. 여성을 맞이하게 된 공동체는 보답의 의미로 음식과 자원을 선물했다. 이러한 과정을 위하여 문화 속에서 근친상간은 금기가 되었다. 근친상간의 금지는 즉각적 쾌락추구와 같은 동물성과 폭력의 지양이었으며, 쾌락을 유보하는 인간적 태도와 인내의 추구였다. 이러한 금기를 지키기 위하여 금기의 위반을 야기하는 성적 요소들 또한 금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에로티즘이 되었다.


"금기는 무엇보다도 일상의 폭력을 저지할 필요에서 생겨난 듯하다. 그렇다면 폭력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폭력에 관한 한 단번에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으며 내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폭력의 다양한 양상이 개진되고 나서야 통일성 있는 금기의 의미 파악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곤경에 빠지는데, 그것은 근본적인 것으로 보이는 금기들이 아주 대립적인 두 영역에 동시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죽음과 번식은 사실 긍정과 부정만큼이나 대립적인 것들이다. 원칙적으로 죽음과 출생은 정반대의 것들이면서도 그 대립성은 제거가 가능하다. 죽음은 다른 것의 출생과 관계가 있다. 하나의 죽음은 다른 하나의 출생을 예고하며, 전자는 후자의 조건이다. 생명이란 다른 생명의 부패의 산물이다. 생명이란 결코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 죽음은 빈자리를 남기며, 죽음에 따르는 부패는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는 데 필요한 물질을 순환시킨다." -에로티즘 p.63


 성과 죽음의 금기,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두 가지 금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무분별한 성의 추구는 문화 속 인간의 죽음을 가져온다. 무분별한 죽음의 추구는 폭력의 개방을 통한 무제한적인 즉각적 쾌락추구, 성의 방탕함을 가져온다. 이러한 바타유의 사유를 이해하려면 프로이트의 사상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는 <쾌락원칙 너머(1920)>를 통하여 죽음 충동의 보편성을 설명하였으며, <문명 속의 불만(1930)>을 통하여 죽음 충동을 통한 폭력성의 분출을 설명하였다. 프로이트에게 쾌락의 추구는 불쾌의 해소이며, 궁극적인 불쾌의 해소는 죽음으로 이어진다. 프로이트에게 쾌락의 추구와 죽음은 연결되어 있다. 바타유의 사유는 이런 프로이트의 사상에 기반한다.


 위에서 밝혔듯이 위반은 금기를 완성시킨다(금기와 위반의 변증법). 그렇기 때문에 문화 속에서 위반은 완전히 금지되지 않으며 오로지 통제된 상태에서만 허용되었다. 이러한 면모를 우리는 종교적 제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고대 종교에는 희생물의 공양이 있었다. 종교적 제의에서 희생물은 인간에서 동물까지 다양하였으나 그들의 죽음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희생 제의에서 희생물은 통제된 죽음을 뜻한다. 종교적 희생 제의를 통하여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죽음의 간접체험을 공유하며 유대의식을 키운다. 또한 구성원들은 죽음의 간접체험을 통하여 억압된 폭력의 해방, 즉 카타르시스와 오르가슴을 공유한다. 제한된 폭력을 통한 공동체의 내적합일은 개체화의 옅어짐, 이것은 이성과 자아의 죽음이며 가장 큰 해방이자 쾌락이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인류의 문화 속에는 항상 에로티즘이 함께했다. 니체가 말한 디오니소스적 충동도 이와 같다. 바타유는 에로티즘이 억압된 죽음의 위반을 통하여 달성되는 제한된 해방임을 밝힌다. 에로티즘은 금기와 위반 사이에 위치한 매혹적인 줄타기이다.


"고립된 개체를 지속시키려는 의지와 연속성 속에 찢기고, 갈피를 못 잡는 존재의 팽창 사이의 대립은 변화 속에 다시 나타난다. 위반의 가능성은 약해지지만 그럼에도 불경의 가능성은 더 활짝 문이 열린다. 에로티즘이 쓰레기 더미에 던져진다고 해도 타락의 길이 아무것도 찢지 못하는 이성정인 성행위가 갖는 중립성보다는 차라리 백배 낫다. ... 우리가 유혹을 느낀다면, 누구나 알다시피 그것은 우리의 내부에 이미 새겨진 경계 초월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는 경계선을 뛰어넘고 싶다. 그때 느껴지는 공포는 우리가 이르게 될 극단을 의미하며, 그런 앞선 공포가 없이는 우리는 극단에 이를 수도 없을 것이다. 만약 어떤 남자가 얼마나 완벽하게 아름다운지 동물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여자를 더 탐낸다면, 그것은 그 여자를 소유할 때 동물적인 더러움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더럽혀지기 위해 욕구되는 법이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욕구는 아름다움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확실히 더럽힌 후에 오는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이다." -에로티즘 p.160


 언뜻 보면 불쾌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에로티즘을 우리는 왜 논해야 하는가? 에로티즘을 동물적 야만성으로 오해해선 안된다. 에로티즘은 그 무엇보다 인간적이다. 절제된 쾌락의 유혹적인 줄타기는 우리를 인간답게 해주는 가장 인간적인 요소이다. 에로티즘의 거부를 도덕성이나 순결함이라 생각해선 안된다. 부도덕함과 불결함의 가능성 없이는 전자는 성립될 수 없다. 도덕성과 순결함도 오로지 에로티즘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바타유는 이성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아름다움 또한 이와 같다. 에로티즘은 아름다움을 완성시킨다. 완벽하게 순결한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던가! 에로티즘의 아름다움을 밝히는 바타유의 사유는 에로티즘처럼 받아들이기도 부정하기도 힘들어 보인다.


"마치자면, 총체적인 문제를 다루는 철학은, 가능하면, 금기와 위반의 역사적 분석에서 새 출발해야 할 것이다. 철학은 그것들의 기원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거기에 반박하면서, 다시 말해 철학을 위반하면서, 존재의 정점을 건드려야 할 것이다. 존재의 정점은 오직 위반의 충동(의식의 전개에 근거한 사고가 노동에 힘입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노동에 종속될 수 없음을 알기에 마침내 노동을 초월하려는 위반의 충동) 안에서만 그 온 모습을 드러낸다.” -에로티즘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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