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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bk Sep 23. 2023

지식인을 위한 변명

Plaidoyer pour les intellectuels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로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그의 명제는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오히려 오해하기 쉬워 이해받지 못하는 명제가 되어버린 것 같다. 사르트르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이유는 바로 그가 실천하는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파리의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였던 사르트르는 안정이 보장되어 있던 출세를 위해 살지 않았다. 그는 나치 점령기의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였으며, 세계대전 종전 후에는 프랑스 공산당에 동조하는 글들을 기고하였고,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어떤 인간도 살아있는 동안 신성시되길 원치 않는다."라는 말과 함께 수상을 거절하였다. 사르트르는 지식의 역할에 대하여 고민하였고, 실천적 방법론을 제시하였으며, 그것을 실천하였다. 이후 왕성한 집필을 지속해 오던 사르트르는 1973년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인하여 저술활동을 중단한다. 그의 저술활동 말기에 출판된 <지식인을 위한 변명(1972)>은 사르트르의 지식과 실천에 관한 사유의 종착점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는 사르트르가 도쿄에서 진행한 세 차례의 강연이 글로 엮어져 수록되어 있다. 오랜 세월 투쟁을 지속해 왔던 사르트르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 했을까?

"사람들은 지식인의 행위와 직능의 테두리가 문화적 보수주의라고 생각하며, 지식인들이 이 테두리를 넘어섰다고 생각되기만 하면 즉시 쓸데없는 헛수고를 한다고 비난하는데 사실 이 비난은 옳은 것이다. 생각해 보라. 지식인들의 말에 누가 귀를 기울여 줄 것인가? 더욱이 그들은 본질적으로 무력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전혀 '생산'하지 않으며, 기껏 봉급에 의존하여 먹고사는데, 그 때문에 지식인들은 정치사회에서는 물론 일상적인 생활 속 세어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가능성이 박탈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힘도 없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들이다. 경제적 힘도, 사회적 힘도 가지지 못한 그들은 자기들 자신이 만사를 판단하도록 부름 받은 엘리트라고 자처하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거기에서 그들의 도덕주의와 이상주의가 비롯되는 것이다. 거기에 또 지식인의 '독단주의'가 운위 된다. 그들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는 신성불가침의 절대적 원칙, 그러나 매우 추상적인 원칙을 들먹거린다는 것이다. 이 원칙이란 물론 맑시즘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의 비난은 다시 한번 모순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맑시즘은 기본적으로 도덕주의와 대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식인들 자체에 이 모순이 존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별달리 거북스럽게 여기지는 않는다. 어쨌든 사람들은 정치인들의 현실주의를 지식인들에게 보여주려 할 것이다. 지식인들이 자기들의 기능, 자기들의 존재 이유를 저버리고 '끝없이 부정하려는 정신'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잇는 동안, 일본에서건 프랑스에서건 정치인들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가를 조용히 재건함으로써 분별 있는 경험주의를 증거 해 주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 - 지식인을 위한 변명 p.10


 근대 사회에서 화는 여러 집단으로 하여금 서로 다른 일거리를 갖도록 하였다. 집단의 목표는 지배계급에 의해 결정되고 노동계급에 의해 실현되지만 수단을 연구하는 일은 학자, 기사, 의사, 법률가, 법학자, 교수 등등의 기술자들에게 넘겨졌다. 기술자들은 각각의 일거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실용적 지식을 연구했으며, 그들을 우리는 '전문가'라고 부른다. 전문가들은 수단의 실현 가능성을 검토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목표에 대한 판단은 그들과 무관한 일이었다. 실용적 지식을 가진 모든 전문가들이 지식인인 것은 아니지만, 지식인은 전문가집단에서 탄생한다.


 르네상스의 열풍이 거세지던 16세기 유럽은 큰 변혁을 맞이하고 있었다. 상업의 발전으로 유럽의 도시에는 부르주아지들이 탄생하였다. 상업의 발전으로 탄생한 이들은 성직자나 왕과 귀족 같은 다른 세력들의 포섭을 권유받았는데, 그 이유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교회와 영주들 간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더 넓은 세계를 지각하게 하였으며, 이는 중세를 지배했던 종교의 교리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의문들을 생산하였다. 예를 들어, "신은 세계를 창조하고 어디로 갔을까?"와 같은 의문이다. 중세의 관측기술로는 우주를 더욱 협소하게 인지하였다.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하늘 밖에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그저 그 밖에는 천상이 있다 믿었다. 하지만 요하네스 케플러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업적으로 인하여 근대의 사람들은 우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우주가 무한히 거대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지게 해주었으며 이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왜냐하면, "만약 우주가 유한하다면 무한한 존재인 신은 어떻게 우주 안에 존재할 수 있는가? 만약 신이 무한한 우주를 창조하고 떠났다면 무한을 뛰어넘어 어디로 떠날 수 있을까?" 혹은, "신이 창조한 피조물인 우주가 무한이라면 신과 같은 무한의 속성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신은 곧 이 우주인가?"와 같은 문제들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류 속에 놓여있던 전문가집단은 각자의 사상을 정립하여 영주나 성직자집단을 옹호하는 사상을 밝혔으며 이들은 스스로를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 철학자라고 불렀다. 여기서 지혜는 이성을 뜻하였다. 근대의 철학자들은 이성을 중심으로 과학주의를 옹호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홉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등이 그러하다. 철학자들은 기존 질서를 비판하며 재단함을 통해 부르주아지가 봉건제도와 싸울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였다. 그 수단은 대게 '자유'와 '평등'과 같은 사상이었다.


 19세기 말엽 부르주아지에 속했던 계몽사상가들의 손자들은 이제 지식인이 되었다. 이들은 실용적 지식을 지닌 전문가들 속에서 배출된다. 이들 속에서 탄생한 지식인들은 이제 자신이 속한 계급(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와 지식인으로써의 역할 간의 불일치를 경험한다. 이들의 특성을 열거해 보면, 1. 전문가는 지배계급에 속하지 않으며, 지배계급이 고용을 결정함으로써 전문가로 위치하게 된다. 2. 전문가의 이데올로기적, 기술적인 교육도, 지배 계급이 수렵한 체제에 의해 규정되며, 필연적으로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 3. 전문가들의 선발은 계급관계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조절된다. 노동자들의 아들이 고등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장학제도도 지배계급이 상황에 따라 정책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탄생하는 지식인들은 성장배경에서 노동자들과 전혀 접점이 없으며 고용자와 같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공범에 위치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잉여가치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이루려는 목표, 자유와 평등에 기반한 사회변혁과 비판, 이상의 추구와 같은 것은 소외된자들의 목표이지 그들 자신의 목표가 아니게 된다. 지식인의 탄생은 이러한 모순 속에서 일어난다. 전문가들이 보편적 가치를 위해 기술을 발전을 이룬다 항변할 수 있지만, 그들이 탐구하고자 했던 실용적 지식은 지배계급이 선택적으로 차용하여 노동자들의 상대적 궁핍화를 가속시킨다. 인간이 '합리적'으로 노동자를 착취하는 현상을 지식인들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사르트르는 진정으로 '실질적인 지식인'은 이러한 자기모순을 자각함으로써,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와 사회 속 구체적 진실의 탐구사이의 대립을 파악하여 제도적 모순을 깨달은 사람들이라 한다.

 "지식인은 그가 누구로부터 위임장을 받은 일도 없고 어떤 권력으로부터도 자리를 배당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로 특정 지워진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지식인 그 자체는 어떤 결정의 산물 -의사나 교수 따위의 권력의 하수인처럼- 이 아니라 기괴한 사회가 만들어 낸 기괴한 산물이다. 아무도 지식인의 존재를 알아주지 않는다. ... 사실상 본래 우리가 사는 사회 속에서 순수한 전문 지식인으로 남아 있기가 불가능하다는 체험적 사실에 의해 지식인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이 그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 사실 그에게 있어서 사회 전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는 근본적으로 모순의 형태로서 그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 자신을 단순히 '주관적으로' 문제 삼는 것에만 만족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를 만들어 낸 일정한 사회 속에 끼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 p.53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들의 주된 적은 '사이비 지식인'이라는 자들이다. 이들은 지배계급의 의지를 확실해 보이는 논리를 통해 옹호하는 자들이다. 이들 또한 지식의 전문가들이며 지식인들과 비슷한 태도를 보이지만, 이들은 상부구조의 말단관리이기 때문에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와 자신들의 이해가 일치한다고 느낀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불리한 것'들을 아예 모르는 척을 한다. 예를 들면, 인간의 소외와 같은 문제들이다. 사이비 지식인들의 타협적인 제안들은 지식인들을 이상주의자나 허무맹랑한 자들로 오해하게끔 유도한다. 하지만 진정한 지식인들은 근본적인 입장을 취하여 사태의 파악을 원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도덕주의자나 이상주의자가 아님을 안다. 사이비 지식인과 진정한 지식인 사이에는 '보편적 인간'을 바라보는 시점의 차이가 있다. 사이비 지식인들은 '보편적 인간'을 안도감을 주는 '이미 정해져 있는 존재'라 여긴다. 진정한 지식인은 '보편적 인간'을 '앞으로 만들어 가야 할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사르트르는 진정한 지식인들의 입장이 과학적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힌다. 이 주장을 이해하려면 현상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진정한 지식인은 현상학적 시각으로 사태를 더 엄밀히 근본적으로 밝혀야 한다. 이들은 모든 인간이 진실로 자유롭고 평등하고 사랑에 가득한 사회적 보편성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끝없이 탐구하고 실패하는 자들이다.

"지식인의 가장 직접적인 적은 내가 '사이비 지식인'이라고 부르려 하는 자들, 니장이 '집 지키는 개'라고 이름 지어 주었던 자들이다. 이들은 지배계급의 사주를 받아 자칭 엄격한 논리 -말하자면 과학적 연구방법의 산물인양 제시되는 논리- 를 통해 특수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려 든다. ... 사이비 지식인은 진정한 지식인처럼 '아니다'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 그는 '아니다, 하지만...', 또는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그래도...'라고 즐겨 말한다. 이러한 논리들은 진정한 지식인을 혼란에 빠지게 한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 p. 63"


  사르트르의 문체가 다소 과격해 보이지만, 그의 강렬한 지적을 외면하기 또한 힘들다. 사르트르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의견을 따라 인간의 소외를 문제 삼았다. "다수의 사람들이 정말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리고 "인간다움이란 어떤 것인가?"와 같은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실존은 본질을 이끌어냄, 또는 본질에서의 탈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르트르에게 실존이란 키워드는 이러한 문제들을 고민하며 인간다움을 개척해 나가는 방식을 뜻다. 현대사회의 우리들은 이러한 고민이 충분히, 혹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현대에 지식인이라 칭하는 자들은 이러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가? 사르트르가 잠시 현대로 돌아온다면 뒷목을 잡고 다시 돌아갈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도구화로 인하여 인간의 고유한 방식인 실존적 삶의 범위가 좁아지는 분위기에 우리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가? 인간의 실존을 망각하여 창조하는 능력이 힘을 잃어간다면, 인간은 단지 무력하게 관찰만을 당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타자의 관찰됨 속에 뭉개지는 주체. 이러한 현상의 가속화는 사르트르의 또 다른 유명한 명제를 더욱더 공감되도록 느껴지게 해 줄 것다.  


"L'enfer c'est les autres."

"타인은 지옥이다. (지옥, 그것은 바로 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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