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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bk Sep 26. 2023

거짓말의 역사

Histoire du mensonge

  해체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 그는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알제리에서 프랑스의 만행의 역사와 함께 성장한 데리다. 그는 시대의 상식으로 굳혀져 있던 서구열강중심의 사상에 의문과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그는 프랑스의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미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활동을 하였다. 서구사상의 중심지였던 프랑스와 미국의 한가운데에서 데리다는 서구중심사상을 과감하게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의 해체사상은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거짓말의 역사>는 데리다가 1997년 파리 국제철학학교에서 이루어졌던 강연을 토대로 쓰인 책이다. 데리다는 거짓말 또한 해체하여 우리에게 거짓말의 허구성을 밝히려 했던 것일까? 그는 거짓말만을 해체하지 않았다. 데리다는 거짓말과 함께 진실마저 해체를 시도한다.


"비록 누군가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더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누군가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은 구조적인 이유로 언제나 불가능합니다. ‘내가 말한 것은 참이 아니다. 분명히 내가 틀렸지만, 나는 속이려고 하지 않았다. 선의였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상대로 우리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 자, 여기서 제가 표명해야 한다고 믿는 거짓말의 전통적 정의에 대립하는 하나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정의의 우세한 형태에서 거짓말은 어떤 사실이나 상태가 아닙니다. 거짓말은 의도적인 행위(intentional act), 즉 ‘거짓말하기‘(lying)입니다. 정해진 거짓말(the lie)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하기’라고 부르는 발언, 그 말하기를 원하는 바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거짓말인가’라고 묻기보다는 ‘거짓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한다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거짓말할 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거짓말의 역사 p.25


 거짓말은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거짓말의 조건에는 고의성이 있어야 하는 듯 보인다. 고의성의 증명이 곧 거짓말의 증명이 된다면, 이것은 어떻게 증명되는 걸까? 거짓말의 고의성이 증명되기 위해선 실제 현상과 거짓말의 발화내용의 불일치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불일치함만으론 아직 거짓말을 증명할 수 없다. 발화자가 거짓말의 발화내용이 실제 현상과 다르다는 명확한 인식 또한 전제되어야 거짓말의 고의성이 성립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몇 가지 문제제기를 해볼 수 있다.


 첫째, 거짓말은 명확하고 불변하는 절대적 실재(자연) 전제되어야 성립한다. 그리고 이것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이다. 인간의 관측에는 한계가 있으며 인간은 주관적인 시선, 주관적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다. 명확하며 불변하는 절대적 실재의 증명은 매우 어려우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게다가 우리는 발화자가 경험한 생생하며 온전한 주관적 인식 또 알 수 없다.


 둘째, 절대적 실재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발화자의 거짓말을 거짓이라 판단하는 주체에 따라서 판단주체의 현상은 다의적이다. 만약 발화자의 거짓말이 청취자가 인식하는 현상과 일치한다면, 그 거짓을 인식할 수 없다. 발화자의 인식과 불일치하는 거짓말이 청취자의 인식에서는 진실이었다면 둘 사이에서 거짓말은 증명될 수 없다. 이 경우 발화자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이 선행되었다 반문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거짓말을 통해 자신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물론 인식주체들의 심리적 피암시성, 혹은 무의식의 영역까지 함께 고려된다면 고의성의 증명은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버린다. 이 경우에는 제삼자의 의문이 제기되어야만 거짓말에 대한 판단이 시작될 수 있다.


 셋째, 거짓말의 증명에 제삼자의 의문이 필수적이라면, (혹은, 발화자와 청취자가 없는 상황에서) 제삼자가 거짓을 판단할 때 진실이라 여겨졌던 현상이 기술의 발전이나 사상의 변화로 인해 거짓으로 판단될 수 있다. 과학기술이 고도화되기 이전 고대 사회에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괴력난신과 같은 신화적 현상들은 진실이었다. 하지만 현대인의 판단으로는 그것들은 환상 혹은 거짓으로 판단된다. 절대지의 불가능성을 토대로 현재의 진실 또한 미래에도 진실일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는 할 수 없다.


"절대적 거짓말 개념에서 우리가 의심하는 것은 이 개념이 절대적 지식, 구성 요소에서 성찰적 자의식의 절대적 지식으로 남아있는 절대 지식을 전제한다는 점입니다. 정의에 따르면 거짓말하는 사람은 그 진실을 알고 있거나 아니면 모든 진실을 알고 있거나,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는 바의 진실을 알고 있고,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고 있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차이를 알고 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이 거짓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 대체-이미지는 원본, 설령 더 유리하게 재현됐어도 더는 원본을 가리키지 않고 재현물에서 대체물의 지위로 옮겨가며 대체물을 더 많이 가리키게 되고, 현대적 거짓말 과정은 진실의 은폐가 아니라, 현실의 파괴 혹은 원본 자료의 파괴가 될 겁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전통적 거짓말과 현대적 거짓말의 차이는 아주 흔히 '은폐하다'와 '파괴하다'의 차이로 귀결된다." -거짓말의 역사 p.42


 엄밀한 의미에서 거짓말의 증명은 불가능하다. 진실과 거짓은 알 수 없는 환상적인 개념이 되어버렸다. 몇몇 현명한 사람은 실체적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합리적 진실을 도출해 나갈 수 있다 생각할 것이다. 합리적 진실은 무엇으로 도출되는가? 바로 인간의 이성이다. 하지만, 현대의 학자들이 지독하게 비판한 것이 인간의 이성과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합리성이 아닌가! 당연하게도 데리다 또한 인간의 합리성에 강한 회의감을 가진 학자 중 한 명이다. 생활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합리성의 해체와 진실 도달의 불가능성을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거대한 물결의 견인들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진실과 거짓의 대립과 거짓말의 가능성이 해체된 후 그 흔적에 남아있는 것은 현상에 대한 발화자의 해석과 의도뿐이다. 발화자의 의도는 과거의 현상을 재생산한다. 재생산이 반복될수록 발화자의 의도는 더욱 뚜렷한 방향을 띄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발화자의 의도의 뚜렷함 또한 재생산을 반복하며 재생산된다. 끝없는 발산의 지속. 이러한 점에서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것은 증명이 아니게 된다. 표현은 항상 창조를 지속하는 힘이다. 데리다는 동일성에 기반한 원본의 허황된 가치를 밝힌다. 하지만 매 순간 주관적 자기 긍정만을 반복한다면 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러한 사유를 맹목적인 주관의 긍정으로 오해해선 안된다. 우리가 표현하기 위해서, 사유를 하기 위해서, 이를 통한 자기 긍정을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주간과 객관사이의 사유가 아닌, 주관과 주관사이의 사유이다.


"한 가지 고백해야 합니다. 서둘러 결론을 내리면서 아무것도, 누구도 거짓말의 역사로서 이 같은 역사와 거짓말 자체의 역사의 필요성과 존재를 결코 '증명'할 수, 다름 아니라 엄격한 의미에서 지식과 이론적 논증과 결정적 판단에 '증명한다'라고 부르는 것을 할 수 없을 겁니다. 이 같은 역사, 거짓말의 역사는 지식의 이론적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거짓말의 역사는 아마도 지식, 모든 가능한 지식에 호소하겠지만, 이 같은 역사는 지식에 구조적으로 이질적인 상태로 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만 지식 너머에 거짓말의 역사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가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거짓말의 역사 p.118


 데리다는 거짓말의 증명 불가능한 성질을 잘 이용하는 분야가 정치라고 밝힌다. 그는 프랑스의 역사를 예시로 들며 설명한다. 최근 미국에서도 이러한 점을 극대화하여 가장 잘 이용한 사람이 있지 않았던가? 우리를 우리도 모르게 일정 방향으로 이끄는 흐름들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합리성의 역사가 아닌, 비합리성의 역사또한 같이 탐구되어야 한다. 합리성은 항상 우월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비합리성이 항상 우월한 것 또한 아닌, 항상 무언가는 이 둘 사이에 위치하여 이항대립으로 구별할 수 없는 그 무엇도 아닌 고유한 것이라는 것. 사이의 사유를 고민하는 것. 이것이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자 무거운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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