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철학을 배우기 어려워할 뿐 아니라 철학이 무엇을 탐구하는 학문인지 알기 어려워한다. 철학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부하며 정리해둔 기초적인 토대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내용이 개괄적이지만, 아마도 아래의 내용을 잘 숙지한다면 어떤 철학이든지 입문하고자 할 때에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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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
인간은 무엇인가를 항상 묻게 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앎을 추구한다". 묻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게 묻는가? 물음은 항상 대화 속에서 이루어진다. 대화 속의 물음과 답변은 질문자와 피질문자가 공통으로 질문대상으로 삼는 "그것"에 대하여 사실을 다루는 "사실에 대한 질문"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며, 자신이 염두한 사실을 인식하고 그 근거를 해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 질문한다. 현대에서 이러한 물음들에 답하기 위하여 발전한 과학과 기술은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과학의 기술의 발전만으로는 인간 본래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문제점만 야기하고, 재난과 위기상황을 몰고 오기까지 한다는 것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절박하게 체험하고 있다. 과학기술을 포함한 경험과학들은 우선 인간의 의미물음에 아무런 답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 이것들은 인간의 본질이라든가 인간적 가치와 행위규범의 근거로 자리 잡을 수 없고, 나아가 전체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라든가 현존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등의 물음에 답을 줄 수가 없다. 이러한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 실재 전체에 대해 그 첫 근거와 최종 목표를 묻는 물음에서 철학은 출발하였다. 어떠한 것이 무엇"이고" 왜 "있는가" 하는 물음은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은 있는 것 일체를 모두 포괄하기 때문에 묻는 사람 까지도 모두 포함하며, 그래서 묻는 사람 자신도 의문에 부친다. 모든 물음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에 대한 물음을 명시적으로 제기하고 또 발전시켜 나가는 것, 그리고 가능한 한 그것에 답변을 제공하는 것, 그것이 예로부터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학문의 과제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을 단순히 지혜 또는 제일철학이라고 불렀고, 신학이라고도 불렀다. 그에 따르면 형이상학은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학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형이상학은 사물의 근거에 대한 학문으로 규정한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근거는 사물의 내적 근거와 외적 근거, 즉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으로 이루어진 4 원인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형이상학의 통일성을 위해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다루는 학문으로 규정한다. 이는 모든 경험할 수 있는 "있는"것들과 그것의 최종 근거들을 모두 포괄하는 학문임을 뜻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따르면서도 그것을 중세의 신학과 융화시켜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서고자 했다. 아퀴나스에게 형이상학은 신 및 다른 초감각적인 것들을 인식하는 한에서 신적 학문 또는 철학적 신학이며, 동시에 존재자 및 존재자로서의 존재자 자체에 고유한 것들을 연구 또한 포함한다. 이는 제일철학으로서 사물들의 제일원인을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퀴나스는 존재자들의 첫 원인, 곧 신의 절대적인 존재에 파고듦으로써 거기서부터 유한한 존재자들을 규명하고자 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자신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그간의 형이상학이 학문으로서 가능한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칸트는 수학-자연과학적 인식 규범에 의거한 학문관을 전제하고 있는데, 이학문관에 따르면 학문은 보편적 필연적 법칙들에 대한 지식이다. 그는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에 결정을 내리기 위해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선험적인 선행조건들을 탐구한다. 칸트에 의하면 이 조건들은 감각적 관조의 선험적 형식들과 순수 지성의 개념범주들과 순수이성의 관념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인식 가능한 것은 감각적 관조와 지성의 사유의 종합이다. 그래서 칸트에게는 인식이 가능한 경험과 그 밖의 외부의 것들로 제한된다. 인식에서 제한되는 "물자체"는 인식을 위해 전제되긴 해도 인식될 수는 없는 것으로 남는다. 이리하여 칸트에게 형이상학은 우리가 "신, 자유, 불멸"에 대해 이성에 따라 사유해야 하지만 실제 하는 것으로 인식하지는 못하는 것으로서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선을 긋는다. 그럼에도 나중에 『실천이성비판』에서 형이상학은 "실천 이성의 요청들"이라는 형태로 다시 등장하는데, 이는 형이상학적 주제들을 자연과학적 규범에 따라 생각되는 엄격한 지식의 내용이 아닌, 도덕적이며 실천적인 이성신앙의 필요에 의한 믿음으로 남겨둔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전통의 형이상학들을 존재망각의 학문이라 비판한다. 그 이유는 전통의 형이상학이 오직 존재자에 대해서만 물을 뿐,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하는 "존재"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 하이데거에 의해 제기된 존재에 대한 물음은 형이상학적 사유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고 존재에 대해 새롭게 숙고하는 분위기를 일깨워주었다. 그는 존재를 시간과 존재자의 역사, 곧 우리에게 그때그때의 운명을 지정해 주고, 또 역사적 조건 아래 있는 존재이해도 지정해 주는 시간적-역사적 사건들로 이해한다. 이러한 사유는 니체의 허무주의의 영향과 결합되어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 안에서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마레샬 학파는 칸트를 극복하고자 칸트의 초월론적 방법론을 발전시켜 새로운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마레샬의 초월론적 방법은 경험적 인식을 분석함으로써 인간 이성의 근본적인 구조와 원리를 탐구하는 방법이다. 칸트가 경험을 넘어서 선험적 구조를 탐구한 것처럼, 마레샬은 인간 이성의 능력을 통해 신적 존재의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는 인간이 사유하는 방식에서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초월적 조건들을 찾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은 경험적이지만, 그 경험을 넘어서는 초월적 조건들이 존재하며, 이를 통해 우리가 사물의 궁극적 근원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감각적 경험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지만 동시에 그 경험을 넘어서 궁극적 실재를 향해 나아가 물음을 던지는 초월적 욕구가 있다 주장한다.
-개념들
존재지평: 인간의 물음은 항상 어떠한 선지식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선지식은 경험적으로 선취된 지식뿐만 아니라 초월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지평을 항상 상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떠한 그것이 "있는"한에서만 그것에 대해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물음의 실행과 함께 미리 물음 안에 놓여있으면서, 앞서 물음의 방향을 설정해 주는, 물음의 가능조건으로서 절대 지평을 존재 지평이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존재 지평의 전제하에 무엇인가를 이해하며 물음을 던진다.
존재자: 존재자는 인식이 관여하는 일체의 대상을 눈앞에 나타내고 생생하게 표현하는 총칭의 개념이다. 이는 정신에 관여하는 일체의 것이라는 의미의 대상으로서, 대상들의 총칭을 존재자라 한다. 또한 존재자는 정신의 현재화이자 재현의 의미를 가진다. 이에 반해 존재는 형상적 대상으로서 구체적 대상이 되지 않는 모든 존재자들을 포괄하는 가장 보편적인 추상 개념이다. 즉 우리는 어떤 존재자를 구체적으로 물을 수는 있지만 어떤 존재를 구체적으로 물을 수는 없다. 존재자의 존재는 오로지 존재자의 내적 원리로써만 성립한다. 이는 모든 존재자에게 각자 고유한 '존재현실력(있음, 긍정)'이 귀속됨을 의미한다.
유비: 논리적으로 초월적인 개념은 유비적일 수밖에 없다. 어떠한 개념이 유비적이라는 것은 그 개념이 자신의 의미를 간직하고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의미로 진술될 때를 말한다. 즉 유비적 개념은 다수성 속의 통일성, 상이성 속의 공통성을 의미한다. 다수성은 어떤 공통적인 규정내용을 전제하는데, 그것을 고려할 때 비로소 사물들이 일치하게 되고 다수성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온갖 가능한 내용을 담고 있는 광범위한 물음과 인식의 다수성 및 상이성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첫 통일성과 공통성에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통일성은 모든 존재자의 존재 안에 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있기만" 하면 무엇이나 포괄하는 초월적 존재자 개념 속에 논리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유비적 통일성이 전제되어야만 우리는 다수성과 상이성의 파악을 통해 지식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다.
본질: 우리는 모든 사물에 대해 있는 것인지와 그것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존재와 본질로 주어진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테텔레스의 현실태와 가능태, 즉 운동에 관한 이론을 존재와 본질의 관계에 적용시킨다. 아퀴나스에게 존재는 존재현실력으로서 실재성의 원리이다. 이것은 존재자에 귀속되는 모든 긍정성과 현실성의 원리가 된다. 그런데 유한한 존재자 안에는 특정하게 한정되는 가능태의 원리가 요구되는데 이것이 바로 본질이다. 본질은 존재현실력을 수용하고 제한하며, 그럼으로써 그것을 유한한 의미형태로 규정하고, 또 존재현실력을 통해 실현된다. 아퀴나스는 본질의 가능태성을 모든 실재성에 앞서는 순수 가능성으로 이해한다.
인식론
인식이란 과연 무엇일까? 철학뿐만 아니라 심리학이나 뇌과학에서도 인간의 인식능력에 문제를 삼고 치료를 하고 있다. 이들은 인지의 패턴이나 인지를 유도하는 특정한 상황을 탐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들은 인식 자체를 문제로 하면서 인식 전반에 관한 탐구를 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학문들은 인식활동이 분명히 존재함을 의심치 않으며, 인간 인식의 확고한 정당성을 전제하고 전체가 아닌 특정한 영역에서 인간의 인식 현상을 탐구한다. 그런데, 인간이 인식한 것이 곧바로 존재하는 것과 직결되는 것일까? 인식이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인식의 기본 조건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들은 철학이 아닌 다른 학문들에서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또한 인식의 가능성이 부정된다면, 이것은 단순한 판단 중지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현상과 사유를 기초로 한 삶의 부정이 되며, 나아가 학문과 윤리의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인간이 무엇을 올바로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은 학문 자체의 부정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장애 요소가 된다. 올바른 인식의 가능성에 관한 질문은 이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인식한다는 것은 우선 주체로서 내가 무엇을 하는 행위를 말한다. 여기서 '나'는 의식 주체로서의 '나'이다. 그리고 '무엇'이란 의식 주체가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 어떤 사물이거나 혹은 어떤 사실일 것이다. 인식한다는 행위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 어떤 의식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대상과 관련한 이 의식활동을 우리는 주체 안에 있으면서도 주체가 아니며, 동시에 그것이 주체 밖의 객체를 직접적으로 지향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서 객체가 아닌 의미로 '노에마'라 부른다. 인식론의 주된 주제는 바로 이런 주체-노에마-객체의 상호관계 규정과 본질을 파악하는 일이다.
플라톤은 인식의 기원의 물음을 던진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는 관념론적으로 인식의 기원을 설명한다. 플라톤에게 참된 실재란 다름 아닌 형상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이다. 이것은 영원불멸하고 보편타당한 것으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초감각적인 것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사고 안에 임의로 형성된 관념의 세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데아의 세계는 주관 밖에 존재하는 참된 실제 세계를 의미한다. 이데아는 모든 것을 규정하는, 모든 것의 원형이며, 모든 사물에 관여하는 존재의 근거이자 모든 것의 형상인, 모든 것이 목표로 하는 목적인 진리이다. 반면에 감각 경험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한성으로 인해 영원한 진리 인식에 방해가 되며, 여기서 얻은 지식은 속견에 가깝다. 이러한 인식 세계의 구별은 인간의 인식근거가 감각 경험이 아닌 사유 자체에 있다는 생각의 출발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실체에 대한 사유이다. 실체라 번역하는 우시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논리적 보편 개념이 아닌 고유한 개별적 사물을 가리킨다. 즉 지시대명사를 통하여 지적할 수 있는 "이것인 무엇"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을 곧 "제1실체"라 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안에서 존재하는 것의 가장 기초를 이루는 실체는 감각 경험을 통하여 우리에게 지각되는 바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경험하는 개별적 사물은 항상 그 무엇으로서 다른 것과 구별되거나 유사한 내용을 그 자체에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이것을 일정한 범주의 양식 안에서 보편적 개념을 통하여 서술한다. 이것을 보편자인 "제2실체"라 한다. 제1실체는 그것이 있다는 형식 외에 다른 어떤 양식으로 서술될 수 없는 고유한 개체를 의미하며, 제2 실체는 그런 경험적인 개별 사물로부터 차이에 의하여 구별되며 분류되어 정의된 고유한 본질, 즉 보편개념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 개념을 가장 확실한 근거로 삼는 플라톤과는 사상적으로 상반된 길을 간다. 개별자가 보편자보다 앞서 있다는 사유는 그의 사상의 기초가 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결합체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감각적 인식을 육체의 느낌임과 동시에 정신(영혼)의 변화 또한 같이 요구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육체로 인한 오감의 소여들은 내감에 의해 조직화되어 감각 활동의 최종 산물인 '감각상'을 형성한다. 그러나 감각상은 언제까지나 개별적이며 특수한 것의 감각상이다. 감각상에는 아직 보편 개념들(본질, 또는 무엇임)이 부재하여 그것을 명사인 그것이라 부를 수 없다. 여기에는 어떤 대상이 무엇임을 표현하는, 정신적인 인식능력인 지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지성은 감각상을 수동적(수동 지성)으로 인식할 뿐 아니라 능동적으로 규정하여 추상화시킬 수 있는 능력(능동 지성) 또한 요구된다. 그런데 그에 따르면, 능동 지성의 활동은 인식이 아니고, 인식을 사전에 준비하는 활동이다. 인간의 인식과정은 [인식되는 사물->각인된 가지상(추상화와 추론을 통해 만들어진)->인식활동->개념화] 순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개념은 오로지 지성 안에만 있는 것으로서 인식 활동의 종착점이다. 즉 인간의 인식활동은 감각 활동에서 시작하여 지성 속의 개념을 도출하여 지식을 확장한다.
르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제2부에서 "... 판단하는 데 있어서, 나의 정신에 명석 판명하게 제시되어 아무도 그것을 의심에 부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없을 것 외에는 아무것도 더 인정하지 말 것."이라 한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에 의해 새롭게 제시되는 점은 '보이는 것이 무엇이냐'를 규정하는 데 있다. 데카르트는 수학과 기하학이 모든 학문들 중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학문들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직 이 학문들 만이 불확실하게 제시되는 경험들에 반하여, 순수하고 단순한 대상을 취급하고, 경험이 불확실하게 제시하는 것 가운데 명백한 것으로 전제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연역하는 것을 통해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학화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 즉 그에 따르면, 연장과 운동 외에는 아무것도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인간은 색이나 소리와 같은 사물의 성질에 대한 관념 또한 가진다. 그는 물질의 연장이나 이동 외의 다른 모든 것을 정신의 세계, '사고하는 사물'에 결부시킨다. 이리하여 성질들은 생각, 관념과 같은 것이 되고, '나'는 하나의 순수한 '사고하는 사물'이 되었다.
존 로크는 모든 관념들이 경험에서 유래된다 생각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가 주장하는 생득 관념(사물, 진리, 사고, 연장,.. 등에 대한)과 같은 것은 없다 주장한다. 왜냐하면 모든 성질들이 우리가 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념들과 상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크는 성질을 물질과 분리될 수 없는 크기, 모습, 구조, 연장과 같은 관념들을 '제1성질'과 색깔, 소리, 맛과 같이 유사한 것이 사물 속에 있어 개인의 주관적 능력을 통해 산출되는 관념인 '제2성질'로 나눈다. 그런데 이러한 주관적인 제2 성질들은 추상화를 통해 보편을 산출하는 지성에 의해 관통될 수 없고, 따라서 수학화 할 수 없다. 데카르트에게 제1성질과 제2성질은 감각적 성질(연장)과 가지적 성질(사유)의 차이였고, 그는 두 성질의 종적 차이를 인정했다. 하지만 로크는 두 성질의 종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로크에게 종적인 실체들에 관한 관념은 없으며, 인간은 사물들의 종적 본질 또는 본성을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로크의 경험론적 철학은 물체들의 본질에 관한 보편적 진리를 선언할 수 없게 된다.
임마누엘 칸트는 이성의 인식능력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의 통합을 시도했다. 그는 경험론자들처럼 인간의 인식능력을 의심하지 않는 소박한 실재론을 거부하며 인간의 인식 능력과 그 형식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고찰함과 동시에 회의론에 빠지지 않는 학문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칸트는 수학과 과학의 토대인 공간과 시간을 '감성의 형식들'로서, 인간의 의식에 대상들이 나타나게 되는 조건들로 정의한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이 개인을 뛰어넘는 신적인 속성이라면, 경험 불가능한 공상적 세계를 상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에게 있어 인간이 인식하는 것은 사물들의 존재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들이며, 다시 말해 인간의 인식 대상은 물자체가 아니라 현상이다. 칸트는 대상을 뛰어넘는 탐구를 위해 '대상의 존재 조건'에 대하여 묻는다. 이것이 바로 사물들의 나타남의 선험적 조건들을 묻는 '초월(transzendnental) 철학'이다. 그는 학문적 가치와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조건으로 '선험적 종합판단'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한다.
-진리에 대한 여러 입장들
대응 이론: 대응 이론은 진술되고 있는 대상과 그에 따른 판단의 일치를 통하여 진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이론이다. 이들은 진리란 개별적인 것에 대한 논리 형식적인 진술 안에서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판단의 정확한 일치가 진리의 기준임을 강조하는 대응 이론은 진리 기준이 인식 주체 밖에 있음을 전제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주관 밖에 있는 객관적 실재를 인식 주관이 자신의 인식 능력을 근거로 얼마나 적합하게 인식하는 가이다. 그런데 여기서 '실재'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에 대한 인식의 객관성을 우리는 어디서 확보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과 검증은 간단하지 않다.
정합 이론: 정합 이론은 진술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실재화의 관계에서 찾기보다는 진술 자체의 모순 없는 정합성에서 찾는다. 인간의 지식은 진술의 형식적 논리성에 많이 의존한다. 지식이란 스스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얻어진다. 이들은 진술 자체에 모순이 없는지를 탐구할 뿐 아니라 그 진술에 선행하는 명제와 명제 사이의 모순 없는 논리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이들은 어떤 판단이든지 자체 모순이 없고 전체로서 판단 체계와 정합적으로 연결된다면 그 판단은 옳다 여긴다. 그러나 이들은 논리적 사유와 실재가 어떤 필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설명할 수 없을뿐더러 한 명제 혹은 명제들 간의 논리적 정합의 자기 타당성을 찾기 어렵다는 문제를 가진다.
실용주의 이론: 실용주의 이론은 진리 기준을 실생활에 정용하는 실용성에 근거 짓는다. 실용주의자들은 일상 안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지식의 실용적 방법에 주목하여 실용적 지식을 참된 지식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이들은 객관적이며 보편타당한 실재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주관의 실천적 관심에 깊은 관계를 가진다. 하나의 신념은 그것이 실천적 행위로 실행될 때 비로소 그 진가가 드러난다. 어떤 신념이 실사 올바르다 할지라도 실천적 행위를 통해 그 결실을 낼 수 없다면, 그러한 신념은 우리에게 공허하거나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용주의자들은 실천적 행위를 통해 진리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생활에 유익한 유용성이라 주장한다. 즉 이들에게 진리란 문제 상황의 해결을 통해요 검증된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실용주의적 진리관은 진리를 단순히 도구적인 의미의 행위 연관 속에서만 파악함으로써 진리의 고정 불변한 객관적이며 확장적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의 행위와 무관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들이 엄연히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지만, 이들은 이러한 것들에 대해 실천적이면서 이론적 측면이 포괄되는 다른 차원의 참된 인식에 대해서 논할 수 없다.
합의 이론: 합의론은 의사소통 공동체 안에서 타당성 요구를 제기하고 그것을 충족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합의가 진리라는 이론이다.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원활한 의사소통은 올바른 지식을 얻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며, 동시에 우리의 지식은 이미 사회 공동체 일원들의 합의된 의견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어떠한 주장이 아무리 올바른 주장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공허한 외침이 될 뿐이다. 합의론은 정당화될 수 있는 모든 요구에 대해서 모든 구성원의 충분한 의사소통을 거친 보편적 합의에 의하여 비로소 진리가 결정된다 주장한다. 이들에게 진리란 무엇을 주장할 때 수용자가 그러한 진술과 결합시키고자 하는 타당성의 요구이다. 여기서 진리는 언어 행위 자체가 아니라 진술이 사용하는 바의 의미를 뜻한다. 즉 진리란 사물이나 명제들과 직접 관련되어 있기보다는 오히려 한 진술 안에 주장되고 있는 바와 더불어 행해지는, 어떤 권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의 '이성적인 합의'에 도달하고자 하는 타당성 요구이다. 그러나 이렇게 도달한 합의가 어떻게 객관적인 진리 기준이 될 수 있는지를 입증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윤리학
인간의 삶은 결정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의 결정을 통해 우리는 여러 형태의 태도와 행동의 가능성들 사이에서 선택을 한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오로지 자신의 임의에 따라 해도 괜찮은 것일까? 아니면 어떤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관점들이 있을까, 그리고 있다면 이러한 관점들은 무엇일까?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의 한 분과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윤리학의 과제는 도덕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을 성찰하는 것, 즉 도덕의 근거에 관해 질문하는 것이다. 도덕은 예술, 학문, 법 그리고 종교와 다른 인간 삶의 한 영역을 표시한다. 이러한 도덕은 어떠한 것이 자신의 영역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의미해 줄 수 있지만, 반면 자기 자신(영역 자체)에 대해 성찰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성찰은 윤리학의 과제로 다루어진다. 윤리학은 도덕적 명제의 근거 혹은 유효성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학문으로서 도덕 영역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다른 학문들과 구별된다. 즉, 윤리학은 하나의 행동양식이 명확하거나 옳게 평가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양식이 올바른 것인가를 묻는다.
도덕 판단의 근거를 지을 때에는 왜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이 방식으로 근거 지었는지에 대해 그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도덕적 언어의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 근거 짓는 것이 적합한지에 대한 질문은 우선 그것의 의미분석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도덕적 판단이 근거 지어질 취급방식에 대한 질문이 오로지 의미 분석의 도움으로 해소될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따라서 근거 지음을 위한 본질적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①이 문장은 근거 지음의 요구가 강조되어 있는가, 즉 하나의 판단을 하고 있는가? ②수식어 ‘~해야 한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관찰 가능한 특성을 내용으로 하는 수식어들과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가? ③주어와 술어의 개념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리고 술어 개념이 주어 개념 안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가? 의미 분석이 ②의 질문에서 필수적인 주요소라고 한다면 근거 지음의 요구는 ③의 질문과 관련된다.
규범윤리학과 메타윤리학의 관계: 규범윤리학은 객관적 언어를 사용하여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관해 근거지 어진 언명들을 만든다. 메타윤리학은 광의의 의미로는 내용적으로 도덕적인 요구들이 근거 짓게 되는 방식에 대한 모든 숙고를 의미한다. 협의의 의미로는 도덕 언어의 의미를 연구하는 것에 한정된다. 많은 분석철학자들은 철학적 윤리학을 협의의 메타윤리학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메타윤리학이 해명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문은 바로 규범윤리학이 철학적 분과가 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일반윤리학과 응용윤리학의 관계: 응용윤리학(의학윤리, 경영윤리, 환경윤리, 매체윤리, 학문윤리 등)은 각 분야에 특별한 원리들, 규범적 기준, 덕들에서부터 출발한다. 응용윤리학은 적합성을 위해 규범적 판단의 서로 다른 응용영역들을구분하고 이러한 응용영역들을 위해 특별한 개념성과 기준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런 원리들은 수많은 숙고된 결정들에서 귀납적으로 얻은 것들이며 사회적 합의로 지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응용윤리학에서는 그들의 원리에 대한 근거지음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이것은 일반윤리학의 과제이다. 그리고 ‘응용윤리학’이라는 용어가 혼동을 야기할 수 있다. 그들이 쓰는 원리들은 윤리학을 유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종종 보편적으로 모든 영역에 유효한 최고 기준이 있고 그것을 연역하여 특별한 규범을 만드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임마누엘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의 정초』의 서문에서 “의무의 근거를 인간의 본성이나 인간이 사는 세계의 환경에서 찾아서는 안 되고, 실천적으로 순수이성의 개념 속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이 저서를 쓴다고 밝히고 있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에게 선의지가 없다면 구체적인 행위가 옳은지, 도덕적 의무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선의지에 관한 칸트의 개념에서 중요한 점은 옳은 행동의 표준이 무엇이든 간에 그 표준은 어떤 결과를 산출하는 그 행동의 유용성(공리주의자들의 주장처럼)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옳은 행동은 그 행동이 규칙이나 원리에 일치하는 것을 표준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규칙이 타당한 도덕규칙이 되려면 어떤 조건들을 만족시켜야 하는가? 최고원리의 척도 또는 도덕의 궁극적 기준, 즉 칸트에 있어서 선천적인 도덕법칙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는 이 도덕법칙을 정언명법이라 부른다. 정언명법은 실천적 숙고의 최상의 법칙이다. 정언명법은 다음과 같이 4가지의 형식을 가진다. “네가 동시에 보편타당한 법칙이 되기를 바랄 수 있는 그런 격률에 따라 행위를 하라", : “너의 행위의 격률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인 자연법칙이 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행위를 하라”, "네가 인간성을 너 자신의 인격에서든 다른 사람의 인격에서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여기지만, 어떤 경우에도 단지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 방식으로 행위를 하라", : “모든 격률이 자기 고유한 법규정에서 가능적인 목적 왕국, 즉 본성의 왕국의 시민으로서 함께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공리주의는 벤담 이후 200년의 역사 속에서 공리주의에게 제시된 반론들에 대해 계속 새로운 변형과 세분화로 응답해 왔고 전체를 조망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정도로 많은 형태로 발전되었다. 자연과학에 따라 각인된 세계에서 공리주의의 매력은 그의 과학적인 인상, 즉 행위들은 양화 될 수 있고 수학적인 계산을 통해 결정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공리주의는 여러 형태로 분화되었지만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기본 논리를 따른다. ①결과주의: 행위정당성의 기준은 오로지 결과이다. ②가치이론: 어떤 가치가 그 자체로 선택할 가치가 있으며 그와 함께 행위의 결과 또는 유용성을 판단할 수 있는지를 제공한다는 이론. ③최대화의 이론: 행위 판단을 위한 배타적인 관점은 모든 당사자의 모든 유용성의 총합, 즉 전체적인 총유용성이다. 공리주의자들에게 쾌락은 최고의 선이며 그리고 그것이 최대화되어야 한다는 법칙이 어떻게 근거 지어질 수 있는지를 묻는다면, 벤담과 밀은 자연주의적 답변을 한다. 어떤 것이 욕구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유일한 논증은 인간이 그것을 사실적으로 욕구하는 것이다. 인간이 ‘갈망하는 것’이 밀에게는 ‘갈망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된다. 각 개인의 행복은 그에게 있어서 선이다. 따라서 전체 행복은 인간 전체에게는 선이다. 그다음에는 행복이 유일한 선이고 정당한 윤리적 행위의 유일한 기준이 된다.
-윤리학에 대한 여러 입장들
* 전통상대주의
상대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도덕법칙의 정당성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주장한다. 맥킨타이어는 전통을 이성성의 궁극적인 규준이라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전통은 정적인 것이 아니고 계속되는 발전으로 개념화된다. 그는 5개의 시기로 이러한 과정을 설명한다. 전통은 권위적인 시기로 시작되는데, 이때는 특정한 신념, 텍스트 권위적인 사람들의 발언이 의심 없이 수용된다. 두 번째 시기에는 권위가 의문시된다. 권위가 양립불가능한 해석을 허용하고, 양립 불가능한 행동을 합리화하고 불일치를 드러내며 새로운 상황에 어떤 답도 주지 못하는 것이 발견된다. 이를 통해 세 번째 시기에는 새로운 공식화, 새로운 가치매김, 새로운 해석 등의 과정이 와서 이 결핍들이 해석된다. 네 번째 시기에는 과정 안에서 도입된 방법들이 제도화되고 일정 정도로 규칙이 정해지고 이 과정에 대한 이론이 정립되면서 진리 개념이 발전한다. 거기서 사용되는 합리성 기준이 성찰된다. 다섯 번째 시기는 ‘인식론적 위기’이다. 전통이 더는 합리성의 발전에 대한 자기 자신의 기준에 의해서는 조금도 발전을 이룩할 수 없는 시점이다. 이 위기는 새로운 개념 들과 인식론적 이론들의 발견으로 극복된다. 그러나 그는 상대주의라는 비난을 무력화시키는데 매킨타이어는 실패했다는 점과, 인식론적 위기의 개념은 과학이론에서 빌린 구성인데 이는 과학의 패러다임과 도덕∙문화적 전통과의 차이를 간과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받는다.
* 비인식주의
비인식주의자들은 윤리 명제는 어떤 진리로 정의된 전제도 포괄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비인식주의는 정서주의, 표현주의, 결단주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서주의: 흄에 따르면 이성이란 진리 혹은 오류에 관한 인식이다. 사실과 합치될 수 있는 명제만이 참이든지 거짓일 수 있다. 이러한 명제들 중 하나는 관념의 관계들에 관한 서술을 포함하는 명제이다. 명제가 관념의 사실적 관계가 합치되면 참이다. 또 다른 하나는 경험의 영역에 대하여 서술을 만드는 명제이다. 그런데 감정과 의지 표명은 이 두 가지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감정이나 의지 행위 그리고 행동은 사실과 일치했느냐의 질문과는 상관이 없다. 이를 바탕으로 흄에게는 이성과 의지의 분리가 뒤따른다. 의지와 감정들은 그 자체로 이성에 대해 상응하지도 모순될 수도 없다. 이를 통해 흄에게는 이성과 도덕의 분리가 뒤따른다. 경험을 가르치는 도덕은 행위와 감정에 영향을 주며, 이 작용은 이성과 단절되어야 하기 때문에 도덕의 규칙은 어떤 이성적 귀결일 수 없다. 즉, 도덕적 진술이 우리 행위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면 그것은 감정에 적용될 뿐, 이성은 아니어야만 한다.
표현주의: 표현주의의 과제는 인간이 도덕적이고 규범적인 파단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자연과학적 세계관에 편입할 수 있을지이다. 광의의 의미로 도덕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논의한다. 협의의 도덕은 후회, 죄의식, 분노와 같은 도덕적 감정들을 다룬다. 이것들은 윤리적으로 악한 행동에 대한 벌에 관한 것이다. 즉 어떤 도덕적 감정이 이성적인지, 혹은 적합한지 그리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는지를 판단한다. 이러한 판단은 합리성의 이해를 전제로 한다. 표현주의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의 사태가 합리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 사태를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동의한다’라는 것은 한 인격이 합리성 때문에 하나의 감정이나 행동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규범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어떤 것이 합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이라고 규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식 상태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상대방에게 수용될 수도 있고 수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의견의 차이는 논쟁을 통해 지양된다는 것은 이들에 의하면 생물학적 진화에서 야기된 생활에 유용한 환상이다.
결단주의: 결단주의는 도덕적 판단의 최종 기준을 협소한 의미에서 이성적 비판에 조명될 수 있는 결단에서 찾는다. 모든 도덕적 판단 명제는 명령으로 이끈다. 술어 “좋다”, “옳다”를 가진 판단은 “~을 해야 한다”로 이끌고 이것은 특별한 종류의 명령이다. “너는 그에게 돈을 갚아야 한다. 왜냐하면 너는 그것을 그에게 약속했기 때문이다.”라는 명제는 “누구나 다시 갚겠다고 약속한 돈은 항상 갚아야 한다.”는 보편적인 판단 혹은 원리를 내포한다. 이러한 도덕적 원리는 보편적인 명령이다. 이 개념을 헤어는 ‘Phrastikon'과 ’Neustikon'의 구별로 설명한다. 서술형 혹은 명령형 문장에서 프라스티콘(전제된 입장)이란 사태에 관해 화자의 어떤 입장이 관계하는지 알리지 않고 문장 안에서 중요한 사태를 구성하는 부분적인 요소로 이해한다. 화자의 입장은 노이스티콘(새로운 입장)을 통해 삽입된다. 위의 사례에서 프라스티콘은 “갚기로 약속한 돈은 모든 사람이 갚아야 한다.”이고 “나는 그것을 요구한다.”는 노이스티콘이 된다. 도덕 판단의 근거지음은 도덕 원리를 전제한다. 그러나 도덕 원리는 원리 결단에서 기인한다. 이것이 결정적인 요점이다. 도덕 원리를 표명하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 원리 결단을 표명한다. 따라서 당위성을 피력하고자 하는 도덕 명제는 “어떠한 규정이나 형식으로 모든 사람들이 행동하기를 바람”이라는 의미가 된다.
* 인식주의
인식주의의 해석에 의하면 도덕 언술의 문장은 진리 주장이 제기되는 진술 내용을 포함한다. 즉 경험적인 사실 표명으로 도덕 명제의 근거 지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은 도덕적인 물음을 경험과학의 도움으로 판가름할 수 있다 주장한다. ‘좋다는 것’이 무엇을 뜻한 지는 언어 차원을 벗어난다. 이 말은 사유의 한 신비스러운 대상을 지칭한다. ‘좋다’라는 단어는 하나의 성질을 지칭하거나, “하나의 단순하고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사유의 대상”인 어떤 것이다. 이 대상이 곧 ‘좋다’는 이름의 의미이다. 그리고 ‘좋다’를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관점은 G.E. 무어의 의미 개념에서 나온다. ‘말(horse)’은 지시되는 대상의 여러 요소를(네 개의 다리, 하나의 머리, 심장 등)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한 대상만 가리키는 단어는 정의 내려질 수 없다. 다른 단어로 정의 내리면 곧 우리는 두 대상을 혼돈하게 된다. 어떤 단어가 하나의 단순한 대상을 가리키면 그것의 의미는 어떤 다른 언어에 의해서도 말해질 수 없다. 언어의 사용은 다른 생활행위와 분리될 수 없는 인간의 생활을 말한다. 따라서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일상 언어적인 사용에 훨씬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인식주의 혹은 정의이론(Infinitionstheorie)의 약점은 이러한 진술들이 분석적이지 않고 종합판단적(경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