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등산의 공통점 = 오르막 길과 내리막 길이 있다는 것.
2014년 6월 말, 나는 갑자기 네팔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히말라야의 설산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이유였다.
등산이라면 질색하는 내가 트레킹을 가겠다고 선포하자 주변에서는 다들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왜 였을까. 지금 생각해도 그 순간의 나는 참 무모했다.
4학년 1학기를 마친 때이기도 했고, 곧 학교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과, 사회에 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적당하게 뒤섞여서 꼭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만 같았다. 그 순간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삶을 돌아보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갖고 정말 무작정 비행기 표를 예약했고, 네팔 정보를 공유하는 카페에 가입해 대략적인 동선만 확인하고는 그리고 정말로 떠났다. 내 인생에서 가장 무계획적인 순간이었다.
"엄마, 나 네팔 갈 거야"
"왜?"
"설산 보려고"
"대신 언니랑 같이 가"
"(가만히 있던 언니) 읭...?"
그렇게 시작된 일주일 간의 트레킹.
나보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언니지만, 그래도 왠지 함께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든든했다.
(사실 나는 겁쟁이다. 무대뽀처럼 큰소리 뻥뻥 치지만 무서워하는 게 정말 많다.)
차로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가고 나서, 드디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향한 첫 발걸음을 뗐다.
별로 가파르지 않은 것 같은 산세와 제법 견딜만한 날씨에 동네 뒷 산 아니냐며 건방을 떨었는데,
겨우 한 시간 만에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미쳤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햇빛이 뜨겁게 내리쬐는 길 위에서,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나지 않는 길 위에서,
무릎이 덜그럭 대는 것만 같은 돌계단이 계속되는 길 위에서,
갈 길이 까마득한 길 위에서.
그저 덥고 힘들고 다리가 아팠지만, 오며 가며 마주치는 다른 트레커들의 파이팅 인사에
오늘의 숙소까지 여기에서 1시간이면 된다는 포터의 격려에, 생각보다 잘 올라가는 언니의 모습에
'저기까지만 가자'를 반복하다 보니 세 시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나있었고
그렇게 첫 번째 롯지에 도착했다.
"누웠을 때 보이는 오늘의 풍경. 바람 소리, 새소리, 사람들 말소리까지 하나하나 다 좋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아도 그저 좋다. 몬순 기간이라 트레킹을 걱정했다고 하니까 포터는 자기는 오히려 몬순 기간이 좋다고 하며 사진을 보여줬다, 꽃들이랑 풀들이랑 하얀 산까지 너무 예쁜 풍경. 얼른 만나고 싶다. 힘들어도 견뎌내야지. 설산 설산. 내 인생의 첫 설산.
오후 3시부터는 비가 오다 멈췄다 한다. 구름들이 눈 앞에서 지나간다. 불을 때는 냄새가 난다. 우리보다 늦게 도착한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도 들린다. 낯선 이 느낌." 2014.07.01
열흘 간의 트레킹은 이른 새벽부터 걷기 시작하고 오후 2시쯤 롯지에 도착해서 쉬는 일의 반복이었다.
걷는 동안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거머리를 경계해야 하기도 했고, 끝이 보이지 않는 돌계단을 올라가야 했고, 그동안 한 번도 운동시키지 않다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며 시위하는 다리를 주물러줘야 했으니까.
그래서 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롯지에서 그동안 밀려있던 생각들을 정리하곤 했다.
삶을 돌아보겠다는 거창한 목표는 길 위에서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걸으면서 나에게 묻고, 묻고 또 물을 뿐이었다.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서.
첫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삶.
웃기게도 트레킹 초반의 나는 투덜이 스머프였다.
내가 오고 싶다고 해놓고 힘들다고 툴툴. 다리 아프다고 툴툴. 밥이 늦게 나온다고 툴툴.
그런데, 돌계단을 천 개쯤 걸은 어느 날, 롯지에 짐을 풀고 하루를 정리하려는데 문득 내가 너무 부끄러워졌다. 짜증어린 표정으로 가득하던 내 얼굴, 괜찮다고 달래주다 지쳐버린 것 같은 포터의 모습.
ABC(Annapurna Base Camp)라는 목표 달성에만 집중하다보니 과정은 즐기지 못했던 거다.
평소에 그렇게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했던 모습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어쩌면, 정작 나는 과정을 즐기지 못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투덜이 스머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남은 기간만이라도 과정에 집중하기 위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점을 찾기 시작했다.
걷는 동안 비가 오지 않는 것에 감사. 거머리에 한 번 밖에 물리지 않아서 감사.
오늘도 무사히 두 다리로 튼튼하게, 별 탈 없이 등산할 수 있어서 감사.
설산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 이렇게 예쁜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
그렇게 보니 하루는 감사할 일 투성이었다.
두 번째 , 순간에 충실한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실천하다보니 주변의 풍경에 조금 더 섬세하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
도심에서는 접해보기 어려운 칠흑 같은 어둠, 영역을 표시하며 우는 벌레 소리, 삐그덕 대는 문 소리, 나무 벽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그저 느껴보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누워서 쉬는 것. 밖에 나가서 구름이 움직이는 풍경을 감상하는 것. 해가 뜨고 지는 순간에 감탄하는 것. 모르는 사람들과 오늘의 여정을 공유하는 것.
아주 작고 사소한 것 같은 일들을 충실하게 느낄 때 그 속에서 피어나는 행복한 감정.
순간에 충실한 삶, 순간을 즐기는 삶을 사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 무조건 좋은 일도, 무조건 나쁜 일도 없다.
트레킹 기간 동안 매일 했던 생각은 '오르막 길과 내리막 길'이었다.
하루에 몇 시간씩 오르막 길과 내리막 길을 걸으면서, 어쩌면 내 삶도 등산과 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없는 오르막 길도 없고 내리막 길도 없구나, 오르막 길이 있어야 내리막 길이 있구나, 불평불만하며 지나치기에는 이 풍경이 너무 예쁘구나. 그런 생각의 연속들.
괜찮다고 토닥이고, 힘들 때는 주저앉아 쉬어도 된다는 걸.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 트레킹을 하면서 얻은 가장 큰 변화는,
내 삶을 내 방향대로, 내 속도에 맞춰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는 것.
빨리 가면 고산병에 걸린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
"요즘의 나는 왜 그리도 걱정이 많았는지 모르겠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만약 그렇게 되면 어쩌지, 혹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어쩌지. 계속해서 걱정하고.
아마도 내가 나한테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냥 나를 믿으면 되는 건데. 나한테는 나만의 속도가 있는 건데. 물론 이 글을 쓰면서도 오락가락하기는 한다. 그래도 이번 여행을 통해 얻은 것 중 하나는, 그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다는 거. 분명히 길은 존재한다는 사실.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꼭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리 가면 고산병에 걸린다.
주변을 둘러보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힘들 때는 쉬어가자.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더 믿기. 파이팅. " 2014.07.09
2년 만에 오랜만에 돌아보니 또 새롭다.
추억을 열어본 김에, 나를 진심으로 믿어주자고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대로 사는 나를 응원해본다.
2016.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