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내 앞에 서 있었다. 야구 모자를 눌러쓴 그의 목덜미는 검은색이었다. 흑인. 나는 인천공항에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내와 아이를 마중하러 나간 길이었다. 계통을 종 잡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입국장의 자동출입문을 통해 빠져나오고 있었다. 출입문 맞은편에는 마중 나온 사람들이 게이트의 유리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 무리에 섞여 있었다. 근사한 가을 코트에 앞이 트인 치마를 입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미인이고 멋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짧게 깎은 머리에 청바지를 입은 중년 사내가 걸어 나왔다.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눈에 띄었다. 그의 뒷모습도 가만히 바라봤다. 단발머리의 젊은 여자가 나왔다. 여행을 마친 듯 들떠있는 표정과 차분한 느낌에 눈이 따라갔다.
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 뭘 하러 이곳에 오는 걸까?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를 갔다 오는 걸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직업을 갖고 돈을 벌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게 신기했다. 직업의 다양함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세분화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언어도 다르고 생활방식도 다른 사람들이 다른 나라 구경을 하러 오는 길이거나 다른 땅의 삶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이라니.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뭔가 각자의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돈을 쓰면서 살아간다. 어딘가로 몰려다니고 어딘가에서 혼자 돌아다니고 있다. 여행.
야구모자를 쓴 흑인은 나풀대는 풀잎 무늬가 그려진 반팔 남방을 입고 있었다. 헐렁한 면바지에 운동화를 신은 그의 등은 흑인 특유의 근육이 느껴졌다. 왜 이곳에 있을까? 당연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겠지. 그렇다면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허름한 차람이 넉넉해 보이지 않았기에 자동적으로 그가 힘든 노동을 하면서 지내겠다 싶었다. 공장, 산업현장, 노가다 같은 단어들이 연상됐다. 번듯한 양복 차림의 사내들이 출구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을 차지하고 누군가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펼치고 있었다. 그 뒷줄에 야구모자를 쓴 흑인이 있었고 그의 뒤에 내가 있었다. 벽 위에 크게 걸린 모니터에는 '도착', '착륙'의 단어가 차례로 표기됐다. 야구모자 흑인이 움직였다. 앞쪽으로 조금 걸어갔다. 말없이 두리번거리던 그가 핸드폰을 꺼내 출입구를 향해 카메라를 들었다. 유리문이 열리고 그가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나는 그와 그의 핸드폰 화면과 출입문을 번갈아 봤다. 누굴까? 그가 기다리는 사람이. 문이 열리고 작은 키에 검은 피부의 여자가 여행 가방을 들고 나왔다. 그가 몇 장의 사진을 빨리 찍고는 옆으로 돌아갔다. 출구의 오른쪽 통로로 나간 그가 그녀를 안았다. 깊게 안고 잠시 입을 맞추는 흑인 남녀.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피부색이 확연히 다른 나라에서, 그의 피부색이 존중받지 못하는 땅에서 그는 아내이거나 연인인 사람을 만났다.
나뭇잎이 팔랑대는 반팔 남방을 입은 흑인 남자와 통통한 몸매의 키 작은 흑인 여자가 인천공항 D 게이트에서 키스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어디에서 이곳까지 날아왔는지 나는 모른다. 잠시 서로를 끌어안았던 남녀는 공항을 빠져나갔다. 한참 후에 푸른색 여행가방을 끌고 걸어오는 아내와 아이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