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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동 Oct 19. 2016

아현동


 밥 먹으러 가는 길에 잠깐 걸었다. 높은 담장과 담장을 넘어 자란 감나무와 축대에 들러붙은 담쟁이가 남아있는 골목. 차 두대가 마주 지나가기 힘든 폭이다. 내 유년의 서울은 이런 골목뿐이었다. 서울의 변두리였던 면목동의 골목은 흙바닥이었다. 비 오는 날이면 질척였던 것 같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첫 세대가 옹색한 살림을 펼쳐 놓을 수 있던 곳은 대개 변두리였다. 그때와 비슷한 골목을 걷는다. 당연히 향수가 느껴지고 옛 기억이 되돌아온다. 향수는 달콤하다. 막상 골목에서 살아가려면 불편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오랜만에 걷는 골목은 충분히 좋았다. 혼자 걸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이와 아내와 처제와 처제의 남친이 있어서 혼자 즐기지 못했다. 가족이란 얼마나 성가신지. 






 이리저리 흩어졌던 시간들이 며칠 사이에 내 방에서 모였다. 나는 모니터 앞에서 오래 앉아 있었고 잔가지가 많았던 생각들은 더 무성하게 자랐다. 노래를 흥얼거리지는 않았다. 파랗게 맑은 기분도 아니었다. 적당히 구름이 끼고 적당히 낮은 온도였다. 뭔가 다른 걸 하고 싶은 욕구가 스멀거렸다. 나는 현장 일을 끝냈고 아내와 아이는 여행을 마쳤다. 재잘대는 둘의 목소리를 한쪽 귀로 흘리며 들었다. <오키나와>는 좋았겠지.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라멘'을 얘기했다. 아이가 '라멘'이 훨씬 맛있다고 한다. 당연하다. 나도 그렇게 느낀다. 라면과 라멘은 차원이 다르다. 맛에 위계가 없고, 맛에 우열이 없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라면'과 '라멘'의 차이가 뚜렷하다. 걸쭉하고 군내가 깊이 가라앉은 라멘을 처음 먹었을 때는 도쿄에 처음 갔을 때였다. 낯선 골목에서 처음 라멘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었다. 한 끼를 때운 것뿐인데 그 맛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워 있어도 앉아 있어도 생각이 났다. 무방비로 있는 여행의 시간 중에 라멘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날 밤 다시 캄캄한 저녁거리로 나갔다. 라멘 집을 찾아 주문을 하고 먹었다. 그 이후로 라멘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맛을 내 새끼가 알아챘다. 아이와 나는 시간이 더 지나더라도 '라멘'을 앞에 두고 지금의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관계가 됐다. 라멘을 바다에 던져 내 새끼를 낚았다. 야쿠자의 문신처럼 내 혀와 아이의 마음에 라멘이 새겨졌다. 






 사랑한다고 말해야겠지. 근데 그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말일뿐인데. 말보다는 느낌이 낫고 느낌보다는 알아채는 게 더 낫다. 말하지 않고 설명 없이도 같이 알아주는 그것, 공명이거나 공감이거나 찌찌뽕 같은 순간. 그건 연애와 닮았지. 그러므로 아이와 아비가 연애를 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동성이니까 불륜에 패륜이 섞이는 것이잖아. 그러면 서로 불편할 테니 그러지 말자. 괜히 쓸데없는 뉴스에 나오거나하면 서로 어색하잖아. 이건 아니다. 뭔가 잘 못썼다. 


고등어조림과 고등어 구이가 같은 반찬으로 나왔다. 제육볶음도 나왔다. 돌솥에 각자의 누룽지를 덥히는 동안 밥을 먹었다. 김치쪼가리와 고등어의 살점을 입 안으로 넣고 씹었다. 햇빛은 늙은 골목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여기도 반짝, 저기도 반짝. 반짝반짝한 오후였다. 배경이 바뀐 무대처럼 완전히 다른 장면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변했다. 나는 과거로 돌아간 채로 커피를 샀다. 커피는 70년대에는 없었으니 21세기의 내가 몇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 커피를 샀다. 카페는 겉보다 속이 더 좋았다. 보기보다 넓고 잘 꾸몄다. 원두커피, 로스팅, 에스프레소 같은 단어들과 어울리게 생긴 사내가 카운터에 있었다. 나랑 역할을 바꿔볼 생각이 없냐고 물어볼걸. 






아, 오늘은 유쾌한 날이다. 걱정이 쌓이는 날이기도 하다. 내일까지 뭘 하기로 했는데, 그건 돈과 관련된 일인데 또 이러고 있다. 그런데 간만에 이런 게으름에, 걱정에, 책임감에 짓눌리는 게 좋다. 아주 좋다. 만족스러운 걱정이다. 배 째라고 해. 






 설명하는 게 싫다. 말도 글도 눈빛도 설명 없이 본론만 전달하면 좋겠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가장 빠른 수단을 택해 직진하면 좋겠다. 직진을 하다가 고꾸라져도 직선으로 나아가면 좋겠다. 나는 단순하니까. 단순한 것은 현대의 '미더덕'이니까. 깨물면 톡! 터지는 게 뜨겁고 알싸해서 맛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미더덕이 먹는 것인데, 먹으려고 하면 자체의 방어수단이 뚜렷해서 그 앞에서 버벅대는 상대를 만난 것 같은. 그러니까 횡설수설하는 골목을 닮은 글을 써보고 싶어서 이러고 있다. 아무거나 되는대로 집어넣고 고추장에 참기름을 두르면 대충 비빔밥이 되는 것처럼 막, 그런 것. 시간이 훑고 간 서울의 중심에 서울의 옛 모습과 가장 닮은 골목이 있다. 






골목은 구부러졌고 아름다웠다. 구석에 몰린 차와 쓸모가 지난 물건들이 아직은 살아있는 곳이다. 저마다 살아서 아직은, 아직은, 하며 버티고 있었다. 나는 그 길을 걸었고 내 아이는 앞에서 걸었다. 이런 곳을 그림으로 그리고 사진으로 남기고 글로 묘사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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