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의 글자 간판

당위성

by p id


오래된 빌라촌의 골목을 거닐면 종종 'ㅈ차장'이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빌라마다 1층에 주차장을 둔 곳이 많은데, 건물이 오래되고 관리가 잘 이루어지지 않다 보니 글자 간판이 떨어진 모양이다. 하나같이 떨어진 글자들을 연달아 보며 재밌다고 생각했다.

'주차자, 주ㅊ장, 이건 주차ㅇ..'


주차장의 떨어진 글자 간판

'이 많은 글자 간판이 떨어졌을까?'

문득 생각이 들었다가 이내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어디에서 온 위화감인지 잠시 생각해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의 초점이 좀 더 본질적인 위치로 옮겨갈 수 있음을 알았다. 현상을 향한 의문은 곧 대상의 존재의미에 대한 질문으로 치환되었다.

'필요해 보이지도 않는 걸 왜 붙여놓은 거지?'

그때부터 탈락된 글자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건물 1층이 기둥으로 이루어져 개방된 구조를 필로티라고 한다. 주차 공간이 협소한 우리나라의 골목 지역에서 빌라를 만들 때, 건물을 필로티로 만들면 1층의 공간을 주차장으로 쓸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주차장의 떨어진 글자 간판

필로티 주차장은 다른 목적의 시설로 해석될 여지없이 본래 목적에 맞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주차장이라는 사실이 뻔히 보이는데 굳이 써놓았을까. 공터에서 주차장의 위치를 안내하거나 주차장의 소유를 나타내는 간판은 많이 보았으나, 그런 경우는 정보 전달이라는 목적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인공물은 영구하지 않다. 낡고 바랜 물건은 시간과 돈을 들이며 관리해줘야 한다. 가치 있는 물건은 계속해서 사람의 손을 타며 가꿔지는 반면, 그렇지 않은 물건은 잊힌다. 건물의 주인들은 새로 간판을 붙여야겠거니 생각하다가도 굳이 돈 들여서 고칠 가치가 있는지 고민하지 않았을까?


떨어진 글자 간판이 처음에 어떤 목적으로 설치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벽면이 심심해 보여 장식 삼아 설치했을 수도 있고, 내가 알지 못할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상태를 보면 그다지 가치 있는 목적은 아니지 않았을까.


일상의 사물 중 이유 없이 존재하는 물건은 찾아보기 힘들다. 모든 사물은 실용적이든 심미적이든 어떤 기능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디자이너는 사물에 자신의 의도를 담아야 한다. 즉, 목적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디자이너가 목적 없이 창조하면 만들어진 물건은 존재의 당위성을 갖지 못한다.


존재의미가 명확하지 않으면 외면당한다. 일부가 유실된 채 웃음거리가 되면서도, 고쳐지지 못하는 주차장의 글자간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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