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3년 전 자취방에 처음 이사 온 날 밤을 기억한다. 방정리를 겨우 마치고 샤워를 하려는데 샤워기에 있는 버튼 하나를 발견했다. 처음 보는 모양새라 내가 모르는 새로운 기능이 탑재된 물건인가 생각했다.
'물을 더 편하게 틀고 잠글 수 있게 샤워기 손잡이에서 물의 흐름을 제어하나?'
기대감을 가지고 버튼을 눌렀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기는커녕 버튼을 누를 수 조차 없었다. 힘이 부족하진 않았는지, 수도꼭지를 올리고 눌러야 하는지, 발견 못한 다른 버튼이 또 있는지, 여러 의문에 따른 시도들을 해봤지만 헛된 일이었다. 버튼이 정확히 엄지 손가락이 놓이는 위치에 있는 데다, 만지면 살짝 들썩이기까지 해 의심할 여지없이 눌릴 것처럼 보였다. 결국 많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그냥 수도꼭지를 올리고 옆에 붙은 밸브를 돌리니 그제야 샤워기에서 물이 나왔다. 알고 보니 버튼이 아닐뿐더러 다른 기능이 있지도 않은, 그저 장식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샤워기의 버튼
행위 지원성은 어떤 행동이 가능한가를 결정한다. 기표는 그 행동이 어디에서 일어나야 하는지를 전달한다. -도널드 노먼(2016), 『디자인과 인간심리』, 학지사
UX 디자인의 창시자로 불리는 도널드 노먼은 제품을 적합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게 사용자를 유도하는 일종의 단서를 기표라고 부른다. 사용자에게 이 위치에서 특정 행동이 가능하다고 암시하는, 또는 지시하는 장치인 셈이다. 스마트폰에서 지문 인식 위치를 알려주는 그림, 포장지를 뜯는 위치를 알려주도록 살짝 잘린 부분 등이 기표에 해당하는 예시로 볼 수 있다.
디자이너들은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암시로 분할선(parting line)과 색채를 많이 사용한다. 부품이 선명하게 나뉜 모습은 개별로 동작할 수 있다는 암시를 하고 대비되는 색채는 사용자의 눈에 명확히 띄기 때문이다.
주위에 있는 키보드, 마우스, 전자레인지, 세탁기 같은 제품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그 제품들의 버튼과 다이얼을 조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까? 터치 등의 방식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상호작용을 구현하려면 부품이 분할되어 있어야 한다. 대비되는 색채는 시선을 끄는 만큼 대개 중요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비상벨 버튼처럼 눈에 띄어야 하거나 다른 여러 상호작용 요소보다 우선순위에 있을 때 자주 사용한다.
디자이너들이 종종 저지르는 실수가 있는데, 스타일이라는 명목으로 분할선과 색채를 함부로 사용하는 점이다. 스타일링 자체는 나쁘지 않다. 모든 제품은 개성을 필요로 한다. 문제는 디자인이 사용자에게 실수와 착오를 일으킬 여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진행될 때 발생한다. 이 문제는 생각보다 흔하다. 개인 경험에 따르면 학부 프로젝트든 실무든, 동료의 스케치를 보고 사용자에게 오해의 여지가 있는 요소를 발견해서 왜 그렇게 디자인했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허전해 보여서' 또는 '예쁠 것 같아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의 행동을 유도한 장치가 사실 장식이라니, 얼마나 허무한가? 마치 함정과도 같다. 때로 사람들은 왜 뜻대로 작동하지 않냐며 물건을 부수는 경우까지 생긴다. 디자이너 개인의 주관으로 아름다워 보일지 몰라도 객관적으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주관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느라 실제 사용환경을 고려하지 못한 채 만들어진 물건은 사용자를 혼란에 빠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