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지각
밤이 벌써 반이나 지나고 달이 하얗게 차올랐다. 오랜만에 달리려니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그럼에도 계속 달릴 수밖에 없었다. 며칠을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대가로 쇠약해진 몸이 차고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폐를 움켜쥐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개운한 상반된 감각이, 다친 무릎이 허용하는 데까지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하천을 따라 이어진 공원을 달리며 어디까지 온 건지 가늠하고 싶었다. 짧게 자란 빛바랜 잔디, 일정한 간격으로 심은 나무, 멀찍이 잠깐씩 등장하는 운동기구... 젠장, 이 공원의 길은 언제나 나를 미로처럼 아득한 장소로 보내버린다. 내가 한동안 본 거라곤 똑같이 생긴 풍경뿐이었다. 이내 쿡쿡 쑤셔오는 무릎 때문에 뜀박질을 멈추고 조금 걸으니 농구코트가 나타났다. 그제야 내가 너무 많은 거리를 지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부터 걸어 돌아가려니 갈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신경과학자 소피 스콘(Sophie Scott) 교수는 "거의 모든 지각은 변화를 감지하는 데서 시작한다. 우리의 지각 체계는 사실상 변화가 감지되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안정된 환경에서는 뇌가 비교적 평온하지만 변화가 감지되면 당장 신경 활동이 급격히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윌 스토(2020), 『이야기의 탄생』, 흐름출판
인간은 변화에 민감하다. 길을 찾을 때 어디에서 왔고 어디를 지나왔는지, 주변에 보이는 사물의 특징을 이정표 삼아 기억한다. 어딜 가나 주변 요소가 변화 없이 동일하게 반복되면 현재 위치가 어디쯤인지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특히 인지 능력이 저하되는 노인이나 치매 환자의 경우 똑같이 반복되는 풍경이 길을 잃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인지 건강을 위한 도시를 디자인하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공공디자인 종합 정보 시스템의 소식지에서 잘 소개하고 있다. 색채나 예술품을 노인의 저하된 지남력을 위해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변화 없이 일정하게 반복되는 자극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극에 무뎌지게 한다. 기계에서 '삐-' 소리가 한 번 나면 우리는 주목하지만 주기를 가지고 지속해 발생하다 보면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로 생각하고 결국 무시한다. 추를 흔들며 최면을 걸 때처럼 지하철의 일정한 흔들림은 졸음을 유발한다. 수업 때 유독 졸음이 오는 이유도 수업 내용이 지루하면 정보로 받아들이지 않고 백색소음처럼 처리하기 때문이다. 변화가 없으면 우리는 그 안에서 아무런 의미를 얻지 못한다.
디자이너는 인간의 지각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나뭇가지를 부러트려 지나온 길을 표시하는 일처럼, 똑같아 보이는 무수한 패턴에 변화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 달리며 지나온 길에 혼자만 유독 큰 나무가 있다든지, 벤치가 모여있는 터라든지, 주변의 맥락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변화하는 요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면 조금 더 일찍 뒤돌아서 달릴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