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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요 Jan 07. 2024

첫 가족사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처음 증상은 코에서 나는 이상한 약냄새였다. 정체불명의 가루약 냄새가 한 번씩 코를 지나 머리를 향해 찡 - 하게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간헐적으로 나던 가루약 냄새는 처음엔 한 달에 한번, 시간이 지난 후엔 이주일에 한두 번, 그리고 몇 달이 더 지나선 며칠에 한 번꼴로 나타났다. 점차 발현 간격이 좁아지니 하루에 두세 번씩 나타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러면서 기억력의 감퇴가 왔다. 몇 시간 전에 이야기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해 동업자에게 지적을 받았고 방금까지 이야기하던 얘기를 기억 못 하는 실수를 반복해 주변인들에게 사과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마지막 증상은 통약이 듣지 않는 통이었다. 두통약이 듣지 않는 두통은 뇌종양의 대표적인 증상으로 종양이 커지면서 뇌압이 상승해 발생하는 것이 원인이니 각종 두통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가게는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장사에 회의감을 느끼던 그쯤 그의 능력을 높이 산 사업가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가게를 다 정리하고 직원(요리사)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 남편만 먼저 도시로 올라가기로 했다. 새로운 직장의 성공여부가 불확실하므로 아이들까지 데리고 전학을 가기보단 그가 먼저 도시에서 정착한 후 나와 아이들이 올라오는 순서로 일을 진행하기로 상의를 마쳤다.


겉으로의 구실은 그러했으나 사실 난 그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내려올 때도 떠밀리듯이 내려왔는데 올라갈 때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올라가게 되는 상황이 싫다는 구차하고 치졸한 오기였다. 그는 새로운 직장에 나가기 앞서 일에 지장이 되는 두통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병원에 갔다. 몇 가지 검사를 진행하고 나니 의사는 동네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병이 아니라며 지금 당장 서울로 가라 했다. big5의 병원은 응급실에서도 대기가 길다면서 검사결과를 보여주면 대기하지 않고 바로 들어갈 수준의 응급상황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뇌종양은 병원을 찾았을 땐 이미 종양의 크기가 커진 상태로 많이 진행되어 발견된다. 병원에선 무리해서라도 응급수술을 잡아주겠노라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답을 대기하는 며칠이 수개월처럼 더디게 느껴졌다. 최대한 빨리라곤 했지만 병원에는 우리 말고도 많은 '급박한 환자들'이 있다. 언제가 될지 병원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뇌부종 줄여주는 약을 하루에 20알 넘게 먹어가며 병원의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매일 밤 우리 네 가족은 부둥켜 껴안고 잤다.


 낮에는 무사하게 수술하고 오라는 지인과 가족들의 따뜻한 위로를 받고 밤에는 남편의 품에 안겨 팔베개를 베며 잠을 청했다. 그의 팔은 여전히 단단했고 따뜻했다. 부종을 줄여주는 약으로 두통증세가 없어 생사가 오가는 것도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그는 아픈 사람 같지 않았고 이 모든 상황은 꿈만 같았다. 눈뜨고 일어나면 불쾌한 감정만 남고 이내 잊힐 악몽 같은 그런 꿈.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애틋한 부부가 된 엄마아빠를 보며 놀리기 바빴다. "어얼 ~ 사이가 좋아졌데요~"짓궂은 표정으로 부모님 놀리기에 열을 올리는 아이들에겐 엄마와 아빠 사이가 왜 다시 좋아졌는지 말하지 못했다."엄마 아빠 사이가 좋아져서 너무 좋아요"라며 히죽대는 아이들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었다. 아이들에게 아빠가 수술을 앞뒀다느니, 잘못되면 죽을 수 도 있다느니의 말을 할 용기가, 내겐 없었다. 그는 밀린 숙제를 하듯 아이들의 핸드폰을 새 걸로 바꿔주고, 필요 없다 마다하는데도 내 신발을 새 걸로 사주고, 가족사진도 찍자고 했다.





우리는 사진관에서 넷이 가족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다. 아이들이 어릴 적 모습을 남기고 싶어 가족사진을 찍자 몇 번 권했을 때 그는 살이 쪄 찍기 싫다는 이유로 매번 거절했고 몇 번의 거절을 당한 뒤 나 역시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먼저 나서서 사진관을 예약했다. 마지막 일지도 모를 가족여행을 가기 전, 마지막 일지도 모르는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급하게 사진관에 들러야 했다. 갑작스러운 일정이라 옷도 화장도 머리도 제대로 준비하질 못했다.


남편은 아들과 둘이 찍고, 딸과 둘이 찍고, 나와 둘이, 다시 아이와 셋이 찍었다. 마지막으로 넷이 함께 찍은 후 단발머리의 젊은 여자 사진사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본인 혼자만 찍고 싶다고 요청했다. 영정사진이었다. 그가 찍는 게 영정사진인 줄 알면서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내겐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남편은 37살의 아내를 앞에 두고 39살의 영정사진을 찍었다. 울컥했지만 울지 않고 참았다. 기분 좋게 와서 울고 싶지 않았으므로 눈물이 흐를 것 같으면 뒤를 돌아 허공을 바라보며 감정을 눌러담았다. 아빠는 영정사진을 찍고 엄마가 울음을 참고 있는 상황을 모르는 아이들은 빈 공간에서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며 놀기 바빴다. 남편이 사진 찍는 모습을 보다가도 아이들이 사진관의 물건을 망가뜨리지는 않을지 틈틈이 주의를 줬다.


남편의 영정사진을 마지막으로 찍고 비용을 결제할 차례가 왔다. 현금으로 결제하면 2만 원 할인해 준다는 말에 남편이 ATM기에서 돈을 뽑아오겠다고 가게를 나섰다. "그래" 하고 보냈다가 길을 못 찾을까 싶어 급하게 달려 나갔다. 다시 돌아오는 남편이 보인다."어... 얼마라 그랬지...?"2분 전에 이야기 한 내용을 기억 못 해 나가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같이 가자" 말하며 손을 잡고 건물을 나와 맞은편 은행으로 걸어갔다. 사진을 찍은 비용과 여행에 필요한 여분의 돈을 넉넉히 출금해 손에 쥐어들고 사진관으로 돌아왔다. 남편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직원에게 결제대금을 주면서 참아왔던 울음이 졌다.


 "죄송해요. 저희 남편이 아파서요. 이게 마지막 가족사진이 될지도 몰라요"



당혹스러워하는 직원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게 감정도 말도 흘러넘쳐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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