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도알 Apr 21. 2021

똑똑한 플레이어

스트레이트 플러시

2017년 여름, 지중해 어딘가, 자정이 넘었지만 평소와 다르지 않은 그런 평범한 밤이었다. 그날 나는 손님과 딜러가 승부를 겨루는 포커게임 UTH (ultimate texas holdem)에 있었는데 3명의 손님이 의자 하나씩을 사이에 두고 띄엄띄엄 앉아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이 지긋한 아저씨 둘은 이미 게임 경험이 많아서 크게 신경 쓸 일이 없었지만,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젊은 인디언 청년이 껴있었다. 


청년은 친구들과 포커를 해본 적이 있다며 호기롭게 앉았으나, 생각보다 큰 베팅 금액에 적잖이 당황하였다. UTH는 미니멈 5불 테이블이지만, 반드시 베팅해야 하는 안티(ANTE)와 블라인드(BLIND) 베팅 존에 각각 5불씩을 걸어야 하고, 여기서 끝이 아니라 딜러 카드와 승부를 보고 싶다면 최소한 5불을 또다시 걸어야 한다. 만약 마지막 베팅을 포기한다면 게임 시작에 걸었던 10불은 자동적으로 잃게 된다. 그래서 미니멈이 5불일지언정 제대로 한 게임을 하려면 사이드 벳을 제외하더라도 최소 15불의 칩이 필요했다. 이 어린 인디언 청년은 서너 번 연달아지더니 게임에 소극적으로 변해버렸다. 그가 힘겹게 게임에 이기더라도 이겨서 가져가는 실제 금액은 얼마 되지 않으니 게임을 하면 할수록 손해 같아 보였다. 급기야 그는 잠깐 쉬겠다며 베팅을 하지 않고 연륜 있는 두 아저씨의 플레이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능숙하게 베팅을 하며 그 청년에게 훈수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돈을 만드는 건 사이드 벳이거든. 

스트레이트 기껏 받아봐야 블라인드 1배라니까? 아무것도 아닌 거지.

저쪽 가면 블랙잭 6불짜리 테이블 있어. 



그는 처음에 100불을 칩으로 바꿨고 그것의 반인 50불을 순식간에 잃었다. 그는 남은 50불의 칩이라도 캐셔에 가져가 다시 돈으로 바꿀 요량으로 손안에 칩을 꼭 쥔 채 한참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마음이 바뀌었는지 그는 가지고 있던 50불 칩을 모두 5불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얼마나 꼭 쥐고 있었던지 50불 칩은 아주 따끈따끈했다. 그의 간절함까지 함께 느껴지는 듯했다.


다시 게임이 시작되었다. 한게임 한게임 일희일비하며 그의 얼굴은 기쁨도 실망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마지막 칩이 모두 베팅되었을 때 그는 놀란 표정과 달리 비교적 차분하게 말했다.


나 스트레이트 플러시 같아.



그 말을 듣고 우리는 동시에 한 방향으로 눈길이 쏠렸고, 오픈된 공유 카드의 넛츠를 봤을 때 스트레이트 플러시는 충분히 나올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가 베팅을 마친 카드를 다시 보려고 하자, 나는 얼른 그를 제지했다. 베팅을 마치면 딜러를 제외하고 어떤 플레이어도 카드를 다시 만질 수 없으므로 모두 그의 카드가 오픈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순서대로 다른 플레이어의 카드를 처리하고 있는 사이 청년은 안절부절 가만히 있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기다렸던 마지막 그의 차례가 왔다. 나는 칩 밑에 깔린 카드 두 장을 재빠르게 꺼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카드를 오픈했다.


Straight flush! Congratulations!



모든 사람들의 축하가 쏟아졌다. 떠들썩한 분위기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구경하러 몰려들었고 하나같이 그를 축하해 주었다. 카지노 매니저는 정해진 순대로 카메라로 게임의 결과와 트럼프가 올바른지 확인하고 나서야 그에게 상금을 지불하였다. 그는 100불 칩을 제외한 모든 칩을 나에게 팁으로 주며 자리에서 떠나 곧장 캐셔로 갔다. 다시 게임하지 않겠다면서. 


그랬던 그가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동안 만나왔던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큰 금액은 현금화시키거나 주머니에 넣어두고 짤짤이처럼 남은 칩만 가지고서 부담 없이 플레이를 이어간다. 우리에게 5200원이 있다고 하면 5천 원은 깨지 않으려는 한편 200원은 쉽게 쓰게 되는 것처럼. 그러나 그가 돌아온 이유는 내게 팁을 더 두둑이 챙겨주기 위해서였다. 또 한 번의 고마움을 표하고 나서 그는 그렇게 카지노를 떠났다. 


정말 이후에 그는 다시 카지노에 오지 않았을까? 

대답은 그렇다. 그는 정말 다시 오지 않았다. 그 청년이 내가 카지노에서 기억하는 가장 똑똑한 플레이어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18세 미만 입장 불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